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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의 배꽃도 가뭇없이 흘러가는 것이라면
지난 봄 나 그 강(江)가에 잠깐 앉았었네
골짜기 비탈길 늙은 배나무 아래
꽃 맞춰 돗자리 펴고 꽃향기로 화전花煎 부치고
한두 점 꽃잎 띄워 몇 잔 소주도 걸쳤었네
미처 당도하기도 전에 바다를 보아버린 江물처럼
범람하던 배꽃 천지 그 환하던 물살이
꽃 진 뒤에 이어질 꽃의 긴 부재不在 잊게 했었네
배꽃 분분한 그 江가 넘치듯 웃음 출렁거려서
동무 하나둘 따라 서서 목청껏 노랠 불렀네
꽃 지운 자리마다 노래의 씨 오래오래 여물어갔어도
나 한동안 배꽃 강(江)가로 나가보지 못했었네
홍수지듯 그 강(江) 봄이면 또 범람할 테지만
올해의 노래 내년의 물길로 거스를 수 없다는 것
며칠만 흘렀다가 감쪽같이 사라진 강(江)이
비로소 마음속 아득히 물꼬를 트며 흘러가네
저 신기루의 강(江)가에서 나 배꽃 떨어진 뒤 처음으로
다시 떨리는 배꼽의 잔 잡아보네
이 잔 비워내면 마음도 몸도 바닥 드러낼 줄
안다 해도 나 어느새 주먹보다 굵어진
배꽃의 배꼽 성큼 베어무네
며칠 동안만 화사하던 배꽃 강(江)가에서
나 배꼽 드러내놓은 채 환하게 웃었네, 웃고 있네(그림 : 김영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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