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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 늙지 않는 집시(詩)/김선우 2014. 9. 26. 23:22
저 집을 기억하네정한 물 발라가며 참빗질을 하고 있는 여인네처럼
단정하게 앉은 그녀의 치마폭에서늙수그레한 세 남자가 자그만 솥을 걸고 막걸리 추렴을 하고 있었네
새로 얹은 기와는 낭창하게 이쁜 청기와였네
꼬들꼬들한 풋봄의 바람이 한소끔씩 불어왔고불가에 가차이 간 아직 좀 찬바람이 화들짝 알을 낳았는지
검댕 묻은 솥 위로 팔랑팔랑 노랑나비 날아 올랐네
모여있던 세 남자 일제히 같은 고갯짓으로 하아-나비구나, 노랑나비로구나
눈가에 잔주름 접으며 청기와 지붕으로 노랑나비
낭창낭창 날아가는 것을 이윽토록 바라보고 있었네저 집을 기억하네
제가 부린 마술이 수줍어 배시시 웃던,
마당귀 빨랫줄엔 흰 빨래들이 말라가고 있었고
빨래속에서 까치며 노랑나비며 채송화를 순식간에 꺼내 보여주던 집,
집도 오래되면 여시가 되어,
아흔살까지 혼자 살며 마루며 마당이며 반질반질하게 닦고 쓸던 그집 할미가
죽은 뒤에도 낭창하게 이쁜 청기와 지붕으로 나비때 내려앉네
금줄을 두르기도 상여를 내리기도 좋은 마당이었네
(그림 : 한경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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