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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허수경 - 등불 너머
    시(詩)/허수경 2014. 9. 25. 21:53

     


    제가 일곱된 해였나요 종가집 냇가에 초립걸패가 들어왔지요

    때는 그믐이라 금방 깜깜해졌지만 등불 켜놓은 곳마다엔 싸리꽃이 재재거리며 희게희게 수다를 떨고 있었지요

    또 하나 등불은 그날 초립걸패 노래꾼이 적벽을 타는데요

    그래, 얼굴이 맨 소기름불인데 아흔 넘은 어른들 기억으로는 막걸리 지 돈 주고 받아먹는 걸패는 처음이라합디다요


    승상님 듣조시오 한번 더 듣조시오 적벽강 급한 불에 각기 목숨 살려고 천방지방으로 도망을 할 적에

    뜻밖의 살 한개 수루루루 떠들어와서 팔 맞아 작신 부러지고 다리조차 맞아 전혀 군례헐 수 있소이까

    어서 목을 베어주소서 혼비고향 둥둥 떠서, 아흐 중모리 훨쩍지쩍 우둥퉁 넘나쌌는데

    애 업은 아낙들 물러서고 꽃잎 물든 처자들 약단 가슴 당최 못 건사해 일찌감치 자리뜨고

    노구들만 오소롱히 뚤레거리는데 내야 뭐 진즉 잠자리로 갔었지요

    새벽참 냇소리 참 허랑터니 내 나갔다 냇가에서 소세하는 노래꾼을 보았는데요

    물로 이빨 우억거리더니 탁 뱉아내고 멍허니 물을 바라만 봅디다요

    새벽참에 아즉 써놓은 등불 너머 시꺼먼 새벽구름 밀려오더니 금세 벌개지는 저 동쪽을 향해

    니미 씨부랄것 오질토록 진 목숨 어쩌고 경드름 쪼로 틀더니
    고만 가설랑은 입때껏 못 봤지요 따는 보이기도 합지요마는 그게 뒷물 아닌개비요,

    뒷물 씁쓸커든 도로 뱉은 물만 종가집 냇가를 흐르든지요 그 등불 너머 당최 분간 못 할 칠흑이든지요

    (그림: 김종근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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