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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언 - 그해 설날의 전설
    시(詩)/시(詩) 2014. 8. 5. 22:30

     

     

     

    - 한리포 전설 9

    세월두 참,
    그전 같으면 온 동리가 시끌벅적 헐텐디

    흰 두루마기 정갈허니 차려입고 집안 맨 웃어른 앞장서고

    식솔들 내리 줄지어 해뜨기 전에 제일 먼점 조상님네들 산소 갔다 오고

    노인네들 계신 집마다 정초 문안 여쭙는 세배꾼들이며 집집이 돌며 덕담 나누는 술꾼들 무리

    옥빛 남빛 곱살스레 바지저고리 차려입고 신작로마다

    발자국들 왁자허니 줄 이을텐디 인젠 설두 설같지두 않구

    그나저나 이놈의 동네가 어디 사람 사는 디 같어야지 육지대로 떠나 버린 빈집들만 여기저기 음산허고

    그나마 남어있다는 건 죄다 꾸부정헌 늙은이들뿐이니

    게다가 해마다 하나둘 세상 뜨다 보니 명절이라구 도회지 나간 자식새끼들 내려오는 집두 두서넛뿐이고

    에이구 설두 이젠 다 옛날 얘기지 늙은이가 뒤주 위에 메 한술이라두 떠놓는 게 어디 여간 애성스런 일이어야지

    세상두 참 요상허지 철두 제대루 모르는 예닐곱에 시집와서

    이렇다 하게 부쳐먹지두 못 헐 오죽잖은 땅뙈기나마 후벼파고

    철철이 산으로 갯기슭으로 기대질치며 극매느라 손톱 한번 제대로 자랄 틈 없이 허구헌날 고단허니

    엄동설한 같은 시부모 모시고 온갖 시집 다 살면서두 그래두 하나 믿고 의지할 건 올망졸망한 저 자식새끼들뿐이라고

    입은 거 벗어 내주고 입안에 든 것이라도 단것이면 뱉어 내 먹이며 길러

    너희들만큼은 절대로 이 지긋지긋헌 세상 대물림하지 말고

    남대두 좋은 세상 떵떵거리며 살아야 한다고 가슴팍 살점 도려내듯 도회지로 살림 내주었더니

    이제 와서는 며느리 시집이라니 참말 거꾸로 흐르는 세월이여

    한해를 통털어 고작 서너번 무슨 일 때나 잠깐 다녀가는 요샌 며느리가 며느리가 아니라 손님이라고는 허지만

    애들 사는 도회지는 밤낮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회사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애기아빠가 비상근무래요 너무 서운해 하지마세요 어머니

    서운허긴 서운허긴 뭐 다 괜찮다 세월이그런걸 어쩌겠니 자식들마저 안내려오니께 그 흔허던 술꾼 하나 언뜻도 않네

    허긴 예전 같으면 보리막걸리나마 밑바닥까지 닥닥 긁어내던 열 말은 실히 넘을 저 큰 술독 거미줄 친지 오래건만 

    아니 할아배는 왜 저기 전화기 옆에 꺼내논 새한복두루마기 안입었어요 설에 입으라고 지난번에 올라갔을 때 큰애가 해준건데

    새옷은 입어 뭐해 눈이나 좀 치울까 웬 눈은 이리도 많이 쌔이나

    아 올사람도 없는데 눈은 치워 뭐해요

    그래두 혹 누가 오기라도 하면……

    아무도 오지 않은 그해 설날
    단단히 얼어붙은 신작로를 따라
    마당 가득 전설 같은 함박눈이 내렸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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