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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소월
    시(詩)/김소월 2014. 2. 8. 12:38

     

    金素月, 본명:김정식 (1902-1934)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의 시인. 1902년에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식으로 평북 구성 출생이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오산학교 교사였던 김억의 지도와 영향 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그리워」등을 창조지에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1922년에「금잔디」「엄마야 누나야」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1922년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1934년 12월 24일 곽산에서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있다.

    김소월은 불과 5, 6년 남짓한 짧은 문단생활 동안 그는 154 편의 시와 시론을 남겼다.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한 김소월의 시는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으며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떠나는 임 향한 변함없는 사랑 표현-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작품슬픔과 한의 정서 미적으로 승화

    ‘진달래꽃’은 김소월 시의 정수(精髓)이며, 한국 서정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민족적인 한의 정서와 민요조의 전통적 운율이 정교하게 결합돼 있고 형태적·소재적 측면에서도 전통적 요소를 현대시로 계승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별의 슬픔을 인종(忍從)으로 극복, 전통적인 정한(情恨)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리듬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별의 정한, 즉 나를 버리고 떠나가는 임에 대한 슬픈 정서를 소박하고 진솔한 정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떠나가는 임을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겠다’는 체념과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나가는 임이지만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겠다’는 사랑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그리고 임의 ‘가시는 걸음걸음’ 이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게 하겠다’는 이별의 슬픔을 축복으로 승화시키는 비애와 그 아픔을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는 인고(忍苦)의 마음이 구구절절하게 녹아 있다.

     소재 또한 우리 민족에 익숙한 진달래꽃을 사용했다. 이 소재는 애(哀)와 한(恨)을 미적 정서로 승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진달래꽃을 통해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 상황을 제시하고, 임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여기서 붉은빛을 띠는 진달래꽃은 임에 대한 화자의 강렬한 사랑이고, 떠나가는 임에 대한 원망과 슬픔이며, 임에게 자신을 헌신하려는 순종의 상징이다.

    이 시에는 임과 이별하는 상황에서 그 슬픔을 인내하는 마음이 절실하게 형상화돼 있는데, 이러한 정서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가시리’ ‘서경별곡(西京別曲)’ ‘아리랑’ 등으로 계승돼 온 우리 전통 시가의 한 맥과 상통한다. 이 작품은 수미상관의 4연 12행으로 이뤄졌고, 7·5조의 음수율과 3음보 민요조의 전통적 가락과 구화체(口話體)를 사용하고 있어 더욱 친근하다.

     ‘진달래꽃’은 1922년 잡지 ‘개벽’ 25호에 실렸고, 1925년에 간행된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에도 수록됐다. 매문사(賣文社)에서 간행한 시집 ‘진달래꽃’에는 토속적 언어로 그리움의 정한을 표현한 그의 작품 127편을 반국판 234면에 싣고 있다. 김소월 생존 시에 간행된 유일한 시집이자 2011년 근대출판물로서는 유일하게 초판본이 문화재로 등록됐다.

    김소월(金素月·1902~1934)의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평북 구성군에서 출생하고, 평북 곽산군에서 성장했다. 1915년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문학스승 김억을 만나 그의 격려로 1920년 동인지 ‘창조’ 5호에 처음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으며, 1916년에는 홍명희의 딸 홍단실과 결혼했다. 3·1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경성배재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학했다. 1923년에는 일본 도쿄 상과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관동대지진 발생 후 중퇴하고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조부의 광산 일과 동아일보 지국 일을 하다 모두 실패하자 술로 세월을 보냈다. 1934년 33살의 나이로 음독자살했다. 1981년 금관문화훈장(1등급)이 추서됐으며 서울 남산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김소월 - 진달래꽃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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