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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춘수
    시(詩)/김춘수 2014. 1. 21. 19:14

    시인 김춘수(金春洙.1922.11.25∼2004.11.29)

    시인. 경남 충무 생. 경기중학교 졸업,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 중퇴. 해방 후 통영중학, 마산중학 교사. 1946년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詞華集) <날개>에 <애가(哀歌)>를 발표하고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동인지 [죽순]에 <온실(溫室)>외 1편을 발표하고, 1949년 [백민(白民)]지에 <산악>, [문예(文藝)]지에 <사(蛇)>를 발표, 데뷔. [노만파(魯漫派)] 동인으로 활동. 마산대, 부산대, 경북대 교수, 한국시인협회 회장(1958)을 역임하였다.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존재와 의미문제를 추구하는 시를 썼다. 그러나 이후에는 일체의 합리적인 맥락을 거부하는 `무의미시'를 창작하여 사물에 대한 자유연상을 존재론적인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다. ‘꽃의 시인’으로 불린다.

    그러나 광주 항쟁 이후 태동한 5공화국 독재 정권 하에서 자신의 지론인 순수시, 무의미 시의 철학과는 정반대로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그 '순수시의 순수성'이 지닌 불순한 의도를 의심받게 되었다. 이는 미당 서정주의 전두환 찬양 연설과 함께 당시 젊은 문학 지망생들의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한국시인협회상(1958), 아시아자유문학상(1959), 경남도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은관문화훈장, 경북도문화상, 대산문학상(1997), 인촌문학상(1998), 제1회 청마문학상(2000), 소월시문학특별상(2004)

    【경향】

    김춘수를 흔히 인식의 시인이라 불린다. 그것은 시의 목표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의 파악임을 의미한다. 그는 주지적 서정을 독특한 수법으로 형상화. 릴케의 경향과 유사한 상징시의 경향을 띠었으나 이후 릴케적인 영향에서 벗어나 의미의 시를 쓰게 되었다. 그 이후 장시 <처용단장>에 이르러서는 설명적 요소를 배제해 버린 이미지적인 작품으로 변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로 보인다.

    그의 언어는 인식을 위한 도구로서 의미 전달이라는 언어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이미지 환기의 수단으로 표현되었다. 아울러 그는 의미를 배제한 이미지를 추구해 왔기 때문에 우리 시의 조형적(造型的) 리얼리티를 강조하기도 한다.

    또한 그의 시에 있어서 언어는 단지 이미지만 남아있는 느낌을 짙게 풍겨주어 설명적 요소와 논리적 요소가 제거된 시적 상황을 새로운 활로(活路)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런 그의 시 경향을 넌센스 포에트리(nonsense poetry-무의미시)라고 한다.

    그는 1940년대까지 이어온 전통적인 정조(情調)와 리듬에 도전, 신감각으로 시사(詩史)에 잇어서 새로운 에스프리와 리얼리티를 전개하여 독자적인 시의 경지를 구축해 왔다. 그의 초기시는 인식ㄷ의 추구가 앞서고, 근래에 이르러서는 의미 배제의 경향이 짙게 변모된 것이다.

    【특징】

    초기에는 릴케의 영향을 받아 사물의 존재와 의미문제를 추구하는 시를 썼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에는 일체의 합리적인 맥락을 거부하는 `무의미시'를 창작하여 사실을 분명히 지시하는 산문 성격의 시를 써 왔다. 즉, 사물에 대한 자유연상을 존재론적인 이미지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물의 이면에 내재하는 본질을 파악하는 시를 써 '인식의 시인'으로도 일컬어진다.

    그는 서구의 상징주의 시 이론을 받아들여 소화한 희귀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그의 상징주의 취향은 초기에는 무한 탐구로, 후기에는 순수시, 절대시의 탐구로 나타난다. 그의 무한 탐구는 릴케류의 기도에서 시작하여 절대에의 동경, 하늘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1. 주지적 인식의 시, 이미지 중시의 시

    2. 시적ㆍ가냘픈 어휘로 구성된 섬세, 세련된 언어

    3. 설명ㆍ논리적 요소가 배제된 철저한 인식, 이미지

    4. 조형적 리얼리티

    【시】<애가(哀歌)>(1946)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분수>(1959) *<나의 하나님>(1969) *<처용단장>(1970.연작시)

    【연작시】*<꽃>(1952.현대문학), *<꽃을 위한 서시>, <꽃의 소묘>, <꽃Ⅰ>

    【시집】<구름과 장미>(1948.첫시집. 행문사) <늪>(1950.제2시집.문예사) <기(旗)>(1951.제3시집.문예사) <인인(燐人)>(1953) <꽃의 소묘>(1959.백자사)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시인협회상 수상작) <타령조ㆍ기타>(1969.문화출판사) <처용>(1974.민음사) <김춘수시선>(1976) <남천(南天)>(1977.근역서재) <비에 젖은 달>(1980.근역서재) <처용 이후>(1982) <김춘수시집>(1986.서문당) <라틴점묘 기타(其他)>(1988)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1990) <돌의 볼에 볼을 대고>(1992) <서서 잠자는 숲>(1993) <호(壺)>(1996) <들림, 도스토예프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거울 속의 천사>(2001) <쉰한 편의 비가>(2002)

    【사화집】<김춘수 사색사화집>(2002)

    【저서】<세계현대시 감상>(1954) <한국 현대시 형태론>(1958) <시론(詩論)>(1961) <시의 표정>(1979) <의미와 무의미>(1982) <시의 이해와 작법>(1989) <세계 현대시 감상> <시의 위상>(1991)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1998.공저.자유지성사) <1원의 경제학99>(1999.공저.자유지성사)

    【수상집】<오지 않는 저녁>(1979)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1993)

    【소설】<꽃과 여우>(1997)

    【전집】<김춘수전집>(1982) <김춘수시전집>(1986) <김춘수전집>(2004.전5권.현대문학사)

    【연보】

    1939 - 경기중학교 4년 수료

    1940 - 일본 니혼(日本)대 예술학원 창작과 입학

    1942 -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해 7개월간 헌병대와 경찰서에 유치. 니혼대학 퇴학

    1944 - 부인 명숙경(明淑瓊) 씨와 결혼

    1946 - 통영중학교ㆍ마산중학교ㆍ마산고등학교 교사(∼1951)

    1946 - <애가> 발표

    1948 - 첫 시집 <구름과 장미> 펴냄

    1950 - 시집 <늪> 펴냄

    1951 - 시집 <기(旗)> 펴냄

    1953 - 시집 <인인(燐人)> 펴냄

    1958 -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한국 현대시 형태론> 펴냄

    1959 - 시집 <꽃의 소묘>, 시집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펴냄. 자유아세아문학상 수상

    1960 - 마산 해인대(경남대 전신), 경북대학교 문리대학 조교수․부교수(∼1978)

    1961 - <시론> 펴냄

    1965 - 경북대학교 교수

    1969 - 시집 <타령조 기타> 펴냄

    1974 - 시선집 <처용> 펴냄

    1977 - 시선집 <꽃의 소묘>, 시집 <남천(南天)> 펴냄

    1978 - 영남대학교 교수(∼1988)

    1978 - 영남대학교 문리대학 학장

    1979 -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1981)

    1979 - 시론집 <시의 표정>, 수상집 <오지 않는 저녁> 펴냄

    1980 - 영남대학교 문과대학 학장

    1980 - 시집 <비에 젖은 달> 펴냄

    1981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1 - 제11대 국회의원(전국 민정)

    1981 - 예술원 회원(시)

    1982 - 시선집 <처용 이후> 펴냄

    1983 - 문예진흥원 고문, 신문윤리위원

    1984 - 문예진흥원 고문

    1986 - <김춘수시전집>(서문당) 펴냄

    1986 - 방송심의위원장, 한국시인협회장(∼1988)

    1988 - 시집 <라틴점묘 기타(其他)> 펴냄

    1989 - 시론집 <시의 이해와 작법> 펴냄

    1990 - 시선집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펴냄

    1991 - 시론집 <시의 위상>, 시집 <처용단장> 펴냄

    1991 - 한국방송공사(KBS) 이사(~1993)

    1992 - 시선집 <돌의 볼에 볼을 대고> 펴냄, 문화의달 은관문화훈장 수상

    1993 - 시집 <서서 잠자는 숲>, 산문집 <여자라고 하는 이름의 바다> 펴냄

    1994 - <김춘수 시전집>(민음사) 펴냄

    1996 - 시집 <호(壺)> 펴냄

    1997 -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 장편소설 <꽃과 여우> 펴냄. 제5회 대산문학상 수상

    1998 - 제12회 인촌상 수상

    1999 - 시집 <의자와 계단> 펴냄, 부인 명숙경 여사와 사별

    2001 - 시집 <거울 속의 천사> 펴냄

    2002 - 사화집 <김춘수 사색사화집>, 시집 <쉰한 편의 비가> 펴냄

    2004 - <김춘수전집>(현대문학) 펴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수상

    【약력】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에서 출생, 통영보통학교를 거쳐 명문 경기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5학년 때 스스로 퇴학하고 40년 일본대학 창작과에 입학하였으나 42년 12월 사상 혐의로 퇴학 처분 당하였다.

    이후 충무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통영중학 교사로 재직 시절인 47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출간했다. 49년 다시 마산중학으로 옮기고 제2시집 <늪>, 제3시집 <기(旗)>, 제4시집 <인인(隣人)>을 차례로 출간하면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전개했다.

    60년대부터 해인대, 경북대, 영남대 교수를 차례로 거쳐 81년에는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한국시인협회상, 자유아세아 문학상, 경상남도 문화상, 대한민국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82년에는 문장사에서 시와 시론에 대한 <김춘수 전집>을 출간하여 회갑 맞이 작품 정리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세계의 여행을 통해서 그의 무의미 시를 다져 가고 있다.

    【김춘수 시의 변천사】

    김춘수의 시는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 큰 변화의 단계가 있다.

    그 첫 번째가 첫 시집이 나오던 47년 무렵부터 50년대의 <꽃>에 대한 일련의 詩가 생산되던 시기까지로 볼 수가 있다. 이 시기를 시인 스스로 이야기하기를 '자기내 세계(自己內世界)'의 시절이라고 한다.

    두 번째 단계는 57년의 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이후로 시작되는 `말의 트레이닝' 단계이다. 이때 시인은 의식과 무의식의 詩作에서의 상관관계에 천착하게 된다.

    마지막 변화의 단계는 두 번째 단계의 시도가 거의 완성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보는 <처용단장 2부>를 시작하던 무렵부터로 본다. 이때부터 시인은 완벽하게 보통 시 속에서 보여지는 통일된 이미지를 버리고 일정하고 보편적인 세계관에서 이탈하며 철저한 허무 속으로 빠지게 된다.

    ▶(가) 의미의 시기 :

    첫 시집인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의 설명을 보면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도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따라서 장미를 노래한 것은 하나의 이국 취미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때로부터 나는 장미를 하나의 유추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시인은 하나의 시적 방법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촉각'에 의지한 詩를 썼으며 그것은 意味(말)보다 먼저 tone이 앞섰다.

    시인의 발상은 서구의 관념 철학으로 접근해 갔으며, 그가 사숙(私淑)했던 릴케의 영향력과 함께 형이상학적 인식의 세계로 침잠하여 선험의 세계를 떠돌기에 이른다. 그러다 결국 시인은 '실제 감각' 따위를 잃어버리고 지적으로는 불가지론의 바닥에서 끝내는 '허무'함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존재의 허무함 앞에서 시인은 <꽃>, <꽃을 위한 서시> 등의 詩를 남기기에 이르는데, 이러한 詩들을 고비로 시인은 의식적으로 '말의 트레이닝' 곧 '데생 시기'로 돌입하게 된다.

    ▶(나) 의미에서 무의미로

    시인은 50년말에서 60년 전반에 걸쳐 이른바 '말의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그것은 관습적인 언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 사물의 의미와 질서에 대한 시적 재구성을 해가는 작업이었다. 그에 의하면 비유적 image를 버리고 image를 위한 image로써 詩를 일종의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은 세잔이 사생(寫生)을 거쳐 추상에 이르는 과정을 확신하고, 詩로 이 과정을 대체 경험하기 위해 노력한다. 즉 사생이라고 해서 있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집이면 집, 나무면 나무를 대상으로 좌우의 배경을 취사선택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상의 어느 부분을 버리기도 하고, 과장되게도 하고, 실제와 전혀 다르게 재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상의 재구성이며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이게 되고 자유 연상이 끼이게 되는 것이다. <처용단장 제 1부>는 이러한 트레이닝 끝에 쓰여진 연작시이다.

    여기서 '말의 트레이닝'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일종의 '언어 유희'이다. 이상(李箱)의 시가 '말의 장난'이었던 것처럼 이 시기의 김춘수의 시를 '예술=장난'이라는 오락 예술론의 재시도로 보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는 무엇이가를 말하려는 시가 아니라 무념무상의 세계로서, 의미가 없는 전체적이며 동시적인 어떤 '연상(聯想)의 순간'과 같은 개념으로 보는 것으로 이러한 것을 '무의미 시'로 지칭한다.

    ▶(다) 무의미시(無意味詩)

    김춘수는 이미지를 이미지 그 자체가 목적인 서술적 심상과 관념을 전달하는 수단인 비유적 심상으로 나누고, 서술적 심상을 다시 대상을 가진 서술적 심상과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으로 나누면서, 바로 이 대상을 놓친 서술적 심상에서 무의미시가 탄생한다고 하였다.

    시인의 표현을 직접 빌리면,

    “나에게 있어 무의미란 무엇일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노력이다.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무의미시는 관습이나 기성 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가 된다. 허무는 일체의 의미를 거부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의미 이전의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 된다.”

    고 하여 그의 시를 지탱시키는 현상학적 에너지가 '허무'임을 이야기한다. 즉 李箱의 경우처럼 대상과 사물과 관념을 제거시키고난 어떤 방심상태, 그 자유스러운 유희의 상태가 곧 '무의미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미시는 전혀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들을 비논리적으로 결합시킨 대상을 놓친 절대 심상인 것이다.

    다른 시인들은 이미지를 얻으려는데 비해 김춘수는 이미지를 버리려 한다. 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의 명중성, 의미성, 상징성 따위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대상의 구속을 받는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언어 행위와 사고 행위가 빚어내는 무의미시, 곧 탈이미지의 리듬과 쾌감으로부터 구원을 얻고자 하는 것이 그의 시이다.

    【김춘수 시에 있어서의 개인적 상징】

    김춘수의 시가 난해한 이유는 기법상의 초현대성과 함께 보편성이 없는 개인적 상징을 그의 시어에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바다>, <꽃> 같은 시어들은 그의 시 속에서 특수한 의미로 표현되는데 특히 <처용단장>의 주된 맥을 이루는 <바다>에 대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면

    “바다는 '병'이고 '죽음'이기도 하지만, 바다는 또한 '회복'이고 '부활'이기도 하다. 바다는 내 '유년'(幼年)이고 또한 내 '무덤'이다.”

    라고 했다. 곧 시인은 <바다>에서 여러 가지 개인적인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고 이러한 의미간의 무상관성 때문에 시는 자연히 보편성을 잃고 난해해지는 것이다.

    【인간 김춘수】

    김춘수는 충무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세상 물정을 모르고 자라난 귀공자였다. 그의 유년기 시절은 자전적인 그의 소설 <처용>에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고 있는 편이다. 그러한 그의 생활이 장년이나 노년이 된 이후에도 그를 현실에서 좀 떨어진 고고한 위치에 서 있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양복 윗도리를 매일 갈아입는 멋쟁이였으며, 미식가였고,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도 선별적으로 사귈 만큼 성격에 융통성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허약해 보이는 체구와 여자의 손처럼 희고 깨끗한 손, 거울 같은 구두에 드러나는 그의 결벽성은, 여러 제자들과 술자리에 어울렸다가 제자들이 술집 여자로 접대하려하면 가차없이 내쫓아버리는 공선생 같은 면모와 맞아 떨어졌다. 무엇보다도 신체의 결정적 결함이었던 대머리를 감추기 위해 한 때는 가발을 쓰고 다니기도 했지만 딸들의 절대적인 반대에 부딪쳐, 계절에 맞게 여러 개의 모자로 대신하기로 했다. 한때는 위장병이 악화되어 수전증까지 일으켰지만 수술 후에는 오히려 몸이 불어나 얼굴에는 윤기가 나고 배가 앞으로 나올 만큼 풍체가 좋아졌으며 자연히 수전증도 사라졌다. 그의 결단력 또한 대단해 수술 후에 결연히 금연을 해 동료 흡연가들을 놀라게 했다.

    집안에서 그는 전기 휴즈도 하나 갈아끼우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교수로 재직하던 시절에도 7,8년간 사진 한 장 찍어보지 못할 만큼 세상살이에는 무관했으며 심지어 카메라의 셔터가 어느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거기다 그는 고소 공포증이 심각해서 74년에 새로 집을 지을 당시 2층 계단에도 올라서지 못할 정도여서 옆집에 살던 동료 교수가 대신 감독을 해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회의원 시절 의원 사절단으로 세계 일주를 다녀오면서 그 심각한 고소 공포증을 고쳤다고 하니 국회의원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그는 예술가답게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18년간 제자 양성에 정성을 기울인 경북대를 떠나 영남대로 자리를 옮긴 것도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악명높던 K총장과 그 주변 인물이 무슨 심의위원회란 것을 만들어 직․간접으로 여러 가지 제약을 가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여겨진다.

    또한 그는 시인이지만 그림에도, 조각에도, 꽃에도 조예가 깊다. 벽에 걸린 탈이나 그림을 늘 즐거이 바라보고 아끼고 사랑한다. 지금도 그의 집 안마당에는 전라(全裸)의 여인상이 자리하고 있고 수많은 기화요초가 향기를 품고 있으며 값의 고하를 막론하고 마음에 들면 즉석에서 구입하는 분재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대학에서 행한 그의 강의는 언제나 열강이었다. 국문학과 전공 강의인 <시론>시간에는 학년 정원의 3배를 웃도는 수강생으로 북적였으며 늘 시간이 끝나는 것도 모르고 강의를 계속해 다음 시간의 교수를 복도에 오래 세워 놓기도 했다.

    제 5공화국 출범과 동시에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어 정계로 진출한 뒤 그는 어느 신문기자와의 대담에서 정치와는 관련이 없던 시인이 의원 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내게 있어 시는 최선의 도덕적 결백을 위한 윤리요, 의지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정치란 최선을 우선하다 차선, 삼선의 여지로서 운영되는 현실에 대한 나의 참여이다."라고 자신의 견해와 입지를 밝히기도 했다.

    시인이요, 교수요, 국회의원이기 이전에 인간 김춘수는 겉으로 보기엔 차갑고 냉담한 느낌의 외모를 가졌지만, 드넓은 통영 앞바다를 사계절 지켜 보며 자란 까닭에 깊고 담담한 인품과 경상도 남자답게 표현에 능숙하지 못한, 조금은 어리숙하고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한 사람의 인간이었다.

    <나의 문학 실험> - 시인 김춘수의 말(중앙일보.1996. 3. 23)

    1940년대 후반은 나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습작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암중모색의 시기다. 남의 시를 모방하면서 어떻게 쓰면 시가 되는가 하는 것을 나대로 습득해가는 과정이었다. 50년대로 접어들자 나에게 비로소 길이 열리는 듯 했다.

    나는 남의 시의 압력으로부터 풀려났다. 그러자 내가 시도하게 된 시는 관념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몹시도 과작이 되어갔다. 1년에 한 편 정도가 고작이었다.

    꽃 연작시에 있어서의 꽃은 단지 소재에 지나지 않는다. 꽃에 빗대어 관념(사상이나 철학)을 드러내려고 했다. 나는 그때 실존주의 철학에 경도되어 있었고, 학생 때 읽은 릴케의 관념시가 새삼 새로운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60년대로 접어들자 시에 대한 또 한번의 회의와 반성이 왔다. 한 3~4년동안 새로운 연습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 무렵 시는 관념으로 굳어지기 전의 어떤 상태가 아닐까 하는 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관념을 의미의 세계라고 한다면 시는 의미로 응고되기 전의 존재 그 자체의 세계가 아닐까 하는 인식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시에서 관념을 빼는 연습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한 3~4년 걸렸다. 시에서 관념, 즉 사상이나 철학을 빼자니 문체가 설명체가 아니고 묘사체가 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존재의 모습)을 그린다. 흡사 물질시의 그것처럼 된다. 묘사라는 것은 결국 이미지만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때의 이미지는 서술적이다. 나는 이미지를 비유적인 것과 서술적인 것으로 구별하게 되었다. 서술적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를 위한 이미지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무엇을 비유하지 않는 이미지다. 무엇을 비유한다고 할 적의 무엇은 사상이나 철학, 즉 관념이 된다. 그러나 서술적 이미지는 그 배후에 관념이 없기 때문에 존재의 모습(사실)이 그대로 드러난다. 즉 그 이미지는 순수하다. 이리하여 나는 이런 따위의 이미지로 된 시를 순수시라고도 하고, 무의미의 시라고도 하게 되었다.

    무의미한 관념, 즉 사상이나 철학을 1차적으로는 시에서 빼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미지가 아무리 순수하게, 즉 서술적으로 쓰인다 해도 이미지는 늘 의미, 즉 관념의 그림자를 거느리게 된다. 이리하여 이미지도 없애야 되겠다는 극단적인 시도를 하게 된다. 이런 상태가 내 무의미 시의 둘쨋번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를 없애고 리듬만이 남게 한다. 흡사

    주문과 같은 상태가 빚어진다. 음악을 듣듯 리듬이 빚는 어떤 분위기에 잠기면 된다.


    <김춘수론-의미와 무의미의 공간> - 이승훈

    김춘수는 1948년 시집 <구름과 장미(薔薇)>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초기시를 대상으로 한 평가이긴 하지만, 김현과 김 윤식은 그의 시가 보여주는 문학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김춘수는 서구의 상징주의 시이론을 받아들여 그것을 소화한 희귀한 시인이다. 대부분의 서구 취향 시인들이 영미 계통의 모더니즘에 세례받은 것을 생각하면 그의 상징주의 취향은 기이하게 느껴진다. 그의 상징주의 취향은 초기에는 무한탐구로, 후기에는 순수시 절대시로 나타난다. 그의 무한탐구는 릴케류의 기도에서 시작하여 절대에의 동경, 하늘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는 투쟁보다는 화해를, 고통보다는 안정을, 탐구보다는 신앙을 오히려 희원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시는 여성적이다. 그의 여성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르지만, 그러나 살려고 애를 쓰지 않을 수 없는 험난한 사회에서의 기도의 자세이다.”

    김춘수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단서는 위의 글에서 주장되는 것처럼 그가 초기에 서구의 상징주의의 시이론을 소화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말라르메나 발레리류의 그것보다는 릴케류의 그것과 통한다. 김 춘수의 초기시는 사실 릴케의 초기시에 많은 영향을 입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김 춘수는 이런 영향 속에서 시 쓰기를 출발하지만, 우리 시의 역사에서는 특이한 시세계를 발전시킨다. 특이하다는 것은 그의 시세계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는 지적 모험을 전개하기 때문이다.

    나는 김 춘수의 시세계를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그 특성을 해명한 바 있다. 이 글에서는 네 시기에 걸쳐 나타나는 그의 시적 특성을 간단히 요약하고, 그후의 작품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기로 한다.

    첫째 시기는 <꽃> <꽃을 위한 서시(序詩)> <나목과 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으로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들 수 있다. 많은 이론가들은 그것을 존재와 언어의 탐구 혹은 존재의 조명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은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 -<꽃>에서-

    이 시행들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꽃’이라는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시 속의 화자가 말하는 대상은 꽃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 꽃은 감각적 실체가 아니라 관념적 실체, 말하자면 개념으로서의 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꽃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다. 이 시에서 꽃이란 화자가 꽃이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비로소 꽃이 된다. 좀더 부연하면 꽃은 인간의 명명행위 이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이다. 꽃이라는 사물이 인간의 명명행위, 곧 언어행위에 의해서만 꽃이라는 사물로 존재한다는 것은 사물과 언어의 관계에 대한 시적 통찰을 낳는다. 그런 점에서 이 시는 모든 사물이 언어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기의 김 춘수는 대체로 이런 인식론의 세계를 노래하며, 그것은 존재의 탐구, 그러니까 사물이 존재한다고 할 때의 그 존재문제에 관심을 둔다. 하이데거의 용어에 의하면 사물현상(being)이 은폐하고 있는 존재현상(Being)을 해명한다.

    둘째 시기는 <부두에서> <봄바다> <忍冬 잎>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로 드러난다. 50년대말에서 60년대 전반까지의 시편들이 그렇다. 물론 이 시기에는 언어유희가 두드러지는 <타령조(打令調)>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서술적 이미지란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다시 말하면 이미지를 어떤 관념의 수단으로도 사용치 않는 그러한 이미지의 세계를 일컫는다. 어떤 관념의 수단이 되는 이미지를 그는 비유적 이미지라고 부르며, 이와는 달리 어떤 관념의 수단도 되지 않는, 그러니까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를 그는 서술적 이미지라고 부른다. 그가 말하는 서술적(descriptive) 이미지란, 번역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로서는 묘사적 이미지라고 부르면 어떨까 싶다. <처용단장 제일부>에서는 이러한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가 한결 심화된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무의미의 시가 태어난다. 그가 말하는 무의미시의 개념은,

    (1)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될 때는 이미지가 대상이 된다.

    (2) 그때 나타나는 시가 무의미시이다.

    (3) 그러나 무의미는 기호론이나 의미론의 용어와는 다르게 사용된다.

    (4) 그것은 자유와 불안의 논리를 띤다.

    (5) 남는 것은 시의 방법론적 긴장이다.

    처럼 요약될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는

    바다에 굽힌 사나이들.

    하루의 노동을 끝낸

    저 사나이들의 억센 팔에 안긴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온전한 바다.

    물개들과 상어떼가 놓친

    그 바다. (부두에서 全文)

    같은 시행들이 보여준다. 여기 나오는 이미지는 어떤 관념도 전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읽는 것은 이른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의 세계이다. 이런 이미지는 대상과의 거리가 상실될 때 나타난다. 말하자면 이미지가 바로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의 세계, 곧 무의미의 시는 예컨대

    “날이 저물자 /내 肋骨(늑골)과 肋骨(늑골) 사이 /홈을 파고 /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베꼬니아의 /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 -<처용단장>-

    같은 이미지로 전환되면서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한다. 어린 시절의 무의식의 실체는 ‘늑골’ 사이에서 ‘날이 저물자’ ‘거머리가 우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세계이다.

    셋째 시기는 무의식의 세계로 전환되는 이런 이미지가 마침내 소멸되는 <처용단장 제이부>를 중심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의 시에서 읽을 수 있는 두드러진 특성은,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른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60년대말에서 70년대 전반까지가 그렇다. 그것은 이미지의 소멸, 그러니까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아니라 한 이미지가 다른 한 이미지를 뭉개버릴 때 태어난다. 그의 시론에 의하면 그것은 한 이미지를 다른 한 이미지로 하여금 소멸케 하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다음의 제3의 이미지에 의하여 꺼져가는 그런 세계이다. 따라서 강조되는 것은 이러한 되풀이가 낳는 리듬이다. 이런 세계를 나는 ‘적나라한 실존의 현기’라고 부른 바 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자유와 불안의 논리를 띤다. 이런 탈이미지의 세계는 예컨대,

    “돌려다오/ 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살똥이 앗아간 것, /女子(여자)가 앗아가고 男子(남자)가 앗아간 것, /앗아간 것을 돌려다오. /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 /女子(여자)를 돌려주고 男子(남자)를 돌려다오. /쟁반 위에 별을 돌려다오. /돌려다오.” -<처용단장 제이부>-

    같은 시행들이 암시한다. 여기서 우리가 읽게 되는 것은 모든 대상이 소멸한 다음 우리가 겪게 되는 불안의 세계이다. 그것은 라공의 표현처럼 <존재하지 않는 오브제의 감성이 번지는 현혹> 속에서 울려나오는 실존의 투사이다.

    넷째 시기는 70년대말부터 80년대초까지 그가 보여주는 시들로 집약된다. 시집 <비에 젖은 달>, 시선 <처용 이후> 등의 세계가 그렇다. 이 시기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탈이미지의 세계, 곧 어지러운 실존의 리듬이 아니라 <이중섭> 시리즈, <예수> 시리즈, <중국 유적지> 시리즈에서 읽을 수 있듯이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담담한 성찰이다. 이런 성찰은 예컨대

    바람아 불어라.

    西歸浦(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남쪽으로 쏠리는

    끝없는 갈대밭과 강아지풀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

    西歸浦(서귀포)에는 바다가 없다.

    아내가 두고 간

    부러진 두 팔과 멍든 발톱과

    바람아 네가 있을 뿐(이중섭)

    같은 시행들로 노래된다. 이 시는 이중섭이라는 구체적 인물의 어떤 정황과 관련되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어떤 정황은 <바람아 불어라>라고 호소하는 인간의 가장 원시적인, 따라서 가장 깊은 충동과 결합된 비탄의 세계를 뜻한다. 이런 비탄의 세계는 화가 이중섭의 내면과 시인 김춘수의 내면이 중첩되는 양상을 띠고, 이 시대의 예술에 대한 성찰을 낳는다.

    이상 네 시기에 걸쳐 드러나는 김 춘수의 시세계는 다시 간추리면 인상파풍의 데생과 릴케류의 감성에서 출발한 그의 시가 첫째로 존재탐구, 둘째로 서술적 이미지, 셋째로 탈이미지, 넷째로 미적, 종교적 성찰의 세계로 전개된다는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80년대말에 나온 시집 <라틴 점묘 기타> 그리고 연작시 <처용단장 제삼부>가 보여주는 시적 특성이 고려되지 않으면 안 된다.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에 대한 시론>

    사생(寫生)이라고 하지만, 있는 실재(實在) 풍경을 그대로 그리지는 않는다.

    대상과 배경과의 위치를 실재와는 전혀 다르게 배치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실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만들게 된다. 풍경의, 또는 대상의 재구성이다. 이 과정에서 논리가 끼어들게 되고, 자유 연상이 개입된다. 논리와 자유 연상이 더욱 날카롭게 간여하게 되면 대상의 형태는 부숴지고, 마침내 대상마저 소멸한다. 무의미의 詩가 이리하여 탄생한다.

    그에 의하면 의미는 산문에 보다 어울리지만 무의미는 시의 형식에만 알맞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에 무의미는 산문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는 시 고유의 영역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의미의 시에 익숙했던 우리의 전통적인 시관에 도전한 것이었다.

    또한 사물에 대한 일체의 판단이나 선입관을 중지하는 방식을 통하여 의미 해체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의 60년대 시 <처용>, <처용 단장>, <샤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이런 대표적인 작품의 예이다.


     


    <원로시인 김춘수 전집 발간> - 연합뉴스(2004. 2. 8)

    한국시단의 원로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82) 시인의 문학세계를 총정리한 <김춘수 전집>(전5권.현대문학 刊)이 발간됐다.

    김 시인은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 1948년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냈다. 이어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단장> <쉰한 편의 비가> 등 근작시집과 시선집을 포함해 모두 25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꽃'을 소재로 한 초기시부터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면에 감춰진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무의미시'에 이르기까지 60년 가까이 한국시단에서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위상을 지켜왔다.

    경남 충무 출신인 그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유학해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과 3학년에 재학 중 중퇴했으며, 귀국 후 중고교 교사를 거쳐 경북대 교수와 영남대 문리대 학장을 역임했다.

    이번 전집은 그 동안 김 시인이 발표한 25권의 시집에 실린 1천여 편의 시를 한군데 묶은 시전집과 두 권의 시론집 등 3권을 1차분으로 발간했다. 장편소설 <꽃과 여우>와 각종 산문들이 실릴 산문전집 두 권은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다.

    '시론전집Ⅰ'에는 <한국 현대시 형태론> <시론-작시법을 겸한> <시론-시의 이해> <의미와 무의미> 등 4권의 시론집이 실렸다. '시론전집Ⅱ'에는 <시의 표정> <시의 위상> <김춘수가 가려 뽑은 사색 사화집>이 수록됐다.

    김춘수 전집은 1982년 [문장사]에서 발간된 뒤 22 년만에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현대문학]이 창간 50주년을 기념해 2년 전 기획해 꼼꼼한 원전 대조, 한자로 된 단어들의 한글 전환 작업 등을 거쳐 내놓았다.


    <연합인터뷰 - 전집 출간한 원로시인 김춘수씨) - 연합뉴스(2004. 2. 11)

    "일제시대 천황 비판했다가 7개월간 옥살이"

    일제시대 도쿄(東京) 니혼(日本)대학 유학생 시절 천황과 총독제도 등에 대해 비판했다는 이유로 7개월간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졌고,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했습니다."

    한국시단의 원로인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82) 시인이 그 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자신의 일제시대 행적과 개인사에 대해 털어놓았다.

    <김춘수 전집>(전5권.현대문학 刊) 발간을 계기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만난 김 시인은 "일제에 저항하거나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말기에 옥살이를 했고 이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고 숨은 사연을 공개했다.

    사연은 이렇다. 경남 통영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일본 유학시절, 이웃에 살던 한국인 고학생들을 따라 도쿄 인근의 가와사키 항구에 하역작업을 하러 몇 차례 간 적이 있었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휴식시간에 한국인 7~8명이 모여 일본 천황이나 총독정치 등에 대해 한국말로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됐다.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헌병보로 일하던 한국인 유학생이 그 자리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겨울방학 때여서 고향집에 가려고 짐을 꾸리는데 야스다(安田)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한 헌병보 유학생이 하숙집에 찾아와 잠깐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그 길로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그를 취조하던 형사가 "부잣집 아들이 뭣하러 하역장에 가서 노무자들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느냐. 비밀결사를 가졌지"라며 다그쳤다. 그는 어이없어 하면서 "그런 일을 한 적도, 심지어 생각해 본적도 없다"고 대꾸했다고 한다.

    "한겨울에 냉수탕에 들어가라고 하길래 (경찰의 무시무시한 고문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어 원하는 이야기를 다 해줬죠. 한달 후 석방이 됐어 돌아왔는데 함께 잡혀갔던 고학생 두 명이 자취방에 못들어가게 됐더군요. 할 수 없이 내 하숙방에 같이 2~3일 있었는데 시부야 경찰서 고등계 형사가 들이닥쳐 '또 모였구나. 안 되겠다. 욕을 봐야겠다'며 경찰서 유치장에 가뒀습니다."

    이로 인해 또다시 반년간 옥살이를 했던 그는 "석방돼 보니 학교에서 제적됐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 불령선인이란 딱지가 붙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연작시 <처용단장>에 당시 수감 경험 등을 일부 밝히긴 했으나 이런 내용을 이처럼 자세히 밝히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20대였던 당시 내가 기질적으로 항일운동 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많이 좌절했고 지금도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찬물(냉수탕)을 보고 겁을 낼 정도였으니까요. 무엇보다 당시 유치장에 함께 수감됐던 도쿄대 좌파 교수의 행태를 보고 이후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됐습니다."

    당시 몇 달간 옥살이로 피골이 상접할 정도였던 김 시인은 "유명한 좌파 교수가 취조실에서 사식으로 받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나눠먹자'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 먹는 것을 보며 사상가(관념가)와 실천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관념을 배제한 '무의미 시'들은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됐습니다."

    그는 "내 또래의 윤동주 시인도 독립운동을 맹렬히 했다기보다 나처럼 우연히 고역을 치르다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라며 "일제말의 수감 경험이나 5공 때 전국구 의원이 된 것은 모두 내 의지가 아니었던 인생의 아이러니들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그는 '나이 팔십을 넘기면서 내 문학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는데 현대문학에서 전집을 발간하겠다고 해서 쾌히 승낙했다"면서 "책이 품위 있게 잘 만들어져 기분이 좋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자신의 시세계에 대해 <꽃의 소묘>로 대표되는 초기 관념시에서 '무의미 시'로 일컬어지는 <처용단장> 등 중기시,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쉰한 편의 비가> 등 후기시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시 '꽃'에 대해 "언젠가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시의 1위로 뽑힌 걸 보면 일반인들은 이 시를 연애시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면서 "사실 이 시는 언어문제와 실존문제에 대해 쓴 철학적인 시"라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30~40대 시인들의 시에 대해 "시가 다양해졌고 수사능력이 옛날보다 크게 향상 됐으며, 시의 비평분야도 안목이 넓고 치밀해졌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일정한 식사, 매일 40~50분의 산책 등을 통해 건강을 유지한다는 그는 소파에 앉아 3~4시간 동안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좋은 휴식이고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멍하게 앉아 있는 시간은 선(禪)적인 명상과 비슷할 거라고도 했다.

    그는 1960년대까지 자전적 이야기를 담아냈던 장편소설 <꽃과 여우>에 이어 197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야기를 소설로 써볼 생각이 있다며 글에 대한 의욕을 드러냈다.


    <"김춘수의 시는 자폐적 상상의 세계> - 장석주: 연합뉴스(2004. 3. 25)

    "김춘수의 언어들은 실재의 세계로부터 끝없이 도피하는 언어, 그 내부로부터 의미를 지워감으로써 현실에 대해 아무 책임도지지 않는 상상적 유희로 환원해버리는 비본래적인 언롱(言弄)의 세계이다"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장석주(49)씨가 한국시단의 원로 김춘수(金春洙.82) 시인의 시세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장씨는 시전문 반년간지 「시경」(박이정 刊) 상반기호에 기고한 평론 '언롱의 한계와 파탄'에서 김춘수의 시세계를 "몽환적 관념들이 춤추는 기표적 기호의 과잉의 세계"이자 "실체가 없는 허무의 유희"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김 시인은 뛰어난 언어적 감수성을 가진 '조형술의 천재' 혹은 '수사의 달인'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언정, 삶에 대한 통찰이나 현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을 하는 '큰 시인'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장씨는 <꽃> <처용단장> <인동잎> 등 김 시인의 작품들이 삶의 실감과 구체성에 닿아 있지 않다고 평했다. 그는 흔히 김 시인의 시세계를 일컫는 '무의미의 시'가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시대와의 소통이 끊긴 공허한 아름다움의 세계는 삶의 위로나 사물에 대한 깨달음을 주지 못하는 의미 없는 언어의 조합일 뿐이라는 비판이다.

    "김춘수는 자신의 뜻 없는 말놀이의 시들을 두고 '무의미의 시'라고 명명하지만, 그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차단된 자의식에 갇혀버린 자의 자기분열과 심약함을 드러내는 기표에 지나지 않는다"

    이어 장씨는 김 시인이 현실에 대한 극도의 환멸과 허무주의로 인해 끝없이 환상 속으로 도망치는 일종의 '심리적 퇴행'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장씨는 그러나 김 시인이 현실 정치에 대해 초연하거나 순수하지는 않았다며 그를 "부르주아 순응주의에 충실한 몽상가, 그저 잔뜩 겁에 질린 노예였을 뿐"이라고 일갈한다.

    1981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변신, "야만적인 정치 현실에 저항하기는커녕 야수들의 대열에 합류"한 사건이 그 상징하는 예라는 것.

    "(김춘수)시인은 개별적 체험에 바탕을 둔 실재와 세계의 전체성에 대한 통찰로 나아가려는 의지가 없었다..시인은 삶과 그것의 자리인 현실에 대해 어떤 진지한 모색이나 탐구의 열정도 없이 몽환적인 이미지를 빚는데 몰두한다"

    대표적인 원로시인이자 심미적 모더니즘 시의 거장으로 불리는 김 시인에 대한 장씨의 거침없는 비판이 문단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 지 주목된다.



    <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는 김춘수의 '꽃'> - 연합뉴스(2004. 8. 13)

    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는 김춘수의 <꽃>이고 가장 많이 애송하는 시인은 서정주인 것으로 나타났다.

    시전문 계간지 「시인세계」 가을호에 실린 기획특집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에 따르면 국내 현역시인 246명을 대상으로 애송시 3편씩을 조사한 결과 가장 애송하는 시는 23명의 시인이 꼽은 김춘수의 <꽃>으로 밝혀졌다. 이어 18명이 윤동주의 <서시>를, 15명이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애송시라고 답했다. 서정주의 <자화상>과 이형기의 <낙화>는 각각 14명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말했다.

    시인별로는 72명의 시인이 꼽은 서정주의 시가 가장 많이 애송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백석의 시는 40명이, 김수영의 시는 36명의 시인이 애송한다고 대답해 그 뒤를 이었다. 서정주의 시는 <동천>, <국화 옆에서>, <무등을 보며> 등 23편이 애송시로 꼽혔다. 백석의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 10편이, 김수영의 시는 <풀>, <눈>등 16편이 애송시로 추천됐다.

    지난주 기도폐색으로 쓰러져 투병 중인 김춘수 시인은 서정주의 <동천>,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 김수영의 <풀>을 애송시로 꼽았다. 김남조 시인은 박목월의 <이별가>, 윤동주의 <십자가>, 서정주의 <역사여, 한국 역사여>를 애송시로 대답했다. 또 강은교 시인은 김수영의 <눈>, 신경림의 <목계장터>, 이용악의 <북쪽>이라고 대답했고 황인숙 시인은 김종삼의 <라산스카>, 김소월의 <옛이야기>,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꼽았다.

    설문 결과와 관련, 고려대 이남호 교수는 "시를 가장 잘 알고 사랑하는 시인들이 서정주의 시를 가장 좋아한다는 사실은, 서정주가 한국현대시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력하게 확인시켜 준다"라고 썼다. 또 "백석이 김소월, 윤동주, 정지용, 한용운 등보다 시인들이 더 좋아하는 시인이라는 사실은 좀 뜻밖이다"라며 "백석은 일반인들보다 시인들이 더 좋아하는 시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춘수 시인, 쓰러지기 전 활발한 기고> - 연합뉴스(2004. 8. 27)

    지난 4일 기도폐색으로 분당 서울대병원에 입원, 지금껏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김춘수(82) 시인이 쓰러지기 전 문예지에 기고한 신작시 등이 발표돼 노시인의 창작욕이 뜻밖에 왕성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계간 [문학수첩] 가을호가 김 시인의 시 <S를 위하여>와 <발자국> 두 편을 게재한 데 이어 계간 [세계의 문학] 가을호도 김 시인의 신작 <장 피에르 시몽>과 <손을 잡는다고> 등 두 편을 실었다.

    [문학수첩]에 실린 <S를 위하여>는 1999년 사별한 아내를 그리며 쓴 시.

    "너는 죽지 않는다./너는 살아 있다./죽어서도 너는/시인의 아내,/너는 죽지 않는다./언제까지나 너는/그의 시 속에 있다"

    로 이어지는 이 시는 아내에 대한 사랑이 시 속에서 불멸성을 갖고 살아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문학수첩]은 김 시인이 두 편의 시를 지난 6월 팩스로 보내왔다면서 창작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세계의 문학] 가을호에 실린 <장 피에르 시몽>과 <손을 잡는다고>는 김 시인이 지난 7월 22일 탈고한 신작시. 시인은 쓰러지기 하루 전인 이 달 3일 「세계의 문학」에 전화를 걸어 우편 도착 여부를 확인했다고 편집진은 전했다. [세계의 문학] 박상순 주간은 "전화로 안부를 묻자 체력이 약한데 날이 너무 더워 견디기가 힘이 든다. 그렇지만 괜찮으니 자주 연락하고 들르라는 말을 남겼다"면서 "이 두 작품이 마지막이 아니길 빈다"고 밝혔다.

    노숙자의 종이 백에는

    칫솔과 치약

    소주가 한 병,

    이 잘 닦고

    소주 한잔 하고 신문지 깔고

    잠이 든다.

    잠이 들면 거기가 내 집,

    이 잘 닦고

    애몽더라드 한 잔 하고 옛날

    장 피에르 시몽도 거기서 잠든 곳,

    이라고 쓴 <장 피에르 시몽>은 삶과 죽음에 초연한 노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누가 보았다 하는가

    길을 가면 또 길이 있다고,

    머리의 뒤쪽

    뒤통수

    그쪽에도 길이 있다고,

    뒷걸음으로 가면

    구름은 내 발 밑에 깔리고

    아득히 깔리고

    내 눈시울은 눈물에 젖고

    나는 어느새

    보이지 않는 사람의 손을 잡는다고

    그 작은 손을,

    이라고 쓴 '손을 잡는다고'에도 삶과 죽음의 문제가 주제를 이루고 있다.

    김 시인이 최근 발표한 작품들의 마지막을 종결부호가 아닌 쉼표로 처리하고 있는 것은 노년에도 식지 않았던 창작열의 상징으로 비친다.

     


    <`꽃'의 시인 김춘수 씨의 삶과 예술> - 연합뉴스(2004. 11. 29)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全文)

    한국시단의 원로 대여(大餘) 김춘수(金春洙) 시인이 `꽃'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시로 꼽히는 <꽃>은 시전문지 「시인세계」가 최근 실시한 `시인들이 좋아하는 애송시' 설문조사에서 1위에 오른 바 있다.

    1946년 광복 1주년 기념시화집 <날개>에 <애가>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김 시인은 1948년 첫 시집 <구름과 장미>에 이어 <꽃의 소묘>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처용단장> <쉰한 편의 비가> 등 시선집을 포함해 모두 25권의 시집을 발표했다.

    릴케와 실존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은 그는 `꽃'을 소재로 한 초기시부터, 관념을 배제하고 사물의 이면에 감춰진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무의미시'에 이르기까지 60년 가까이 한국시단에서 모더니스트 시인으로서 위상을 지켜왔다. 그의 문학세계를 총정리한 <김춘수전집>(현대문학.5권)이 지난 2월 출간됐다.

    전집 출간 직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만난 김 시인은 대표시 <꽃>에 대해, “언젠가 연예인들이 좋아하는 시의 1위로 뽑힌 걸 보면 일반인들은 이 시를 연애시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면서 "사실 이 시는 언어문제와 실존문제에 대해 쓴 철학적인 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시세계를 <꽃의 소묘>로 대표되는 초기 관념시에서 `무의미시'로 일컬어지는 <처용단장> 등 중기시, 관념시와 무의미시의 변증법적 지양을 통해 형성된 <쉰한 편의 비가> 등 후기시로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 시인이 평생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무의미시'를 썼던 것은 일제시대 겪은 개인적 체험과 무관하지 않다. 전집 출간을 계기로 만났던 그는 "일제에 저항하거나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지만, 니혼(日本)대학 유학시절인 일제말기에 옥살이를 했고 이로 인해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고 숨은 사연을 공개했다.

    경남 통영의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김 시인은 일본 유학시절, 이웃에 살던 한국인 고학생들을 따라 도쿄 인근의 가와사키 항구에 하역작업을 하러 몇 차례 간 적이 있었다. 돈이 궁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휴식시간에 한국인 7~8명이 모여 일본 천황이나 총독정치 등에 대해 한국말로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됐다.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헌병보로 일하던 한국인 유학생이 그 자리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7개월간 옥살이를 했고, 퇴학을 맞았으며, 고향에 돌아온 뒤에는 불령선인의 딱지가 붙은 채 살았다. 그는 연작시 <처용단장>을 통해 당시 수감 경험 등을 일부 밝히기도 했다.

    그는 일제말기 냉수탕 고문이 두려워 모든 것을 털어놓았던 자신을 보며 기질적으로 항일운동 등에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많이 좌절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함께 수감돼 있던 일본의 유명한 좌파 교수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혼자 먹는 것을 보고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는 "사상가(관념가)와 실천가는 다르다는 것을 그 때 깨달았다. 관념을 배제 한 `무의미시'들은 이런 경험이 바탕이 됐다"면서 "내 또래의 윤동주 시인도 독립운동을 맹렬히 했다기보다 나처럼 우연히 고역을 치르다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일제말의 수감 경험이나 5공 때 전국구 의원이 된 것은 모두 내 의지가 아니었던 인생의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김 시인은 5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경기도 분당에 사는 큰딸 영희(59)씨의 아파트 근처에 살았다. 직장에 다니는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살았던 그는 지난 8월 4일 기도폐색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시작(詩作)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전집 발간 이후 써온 시를 엮은 신작시집 <달맞이꽃>이 12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그의 대표적 산문으로 엮은 단행본도 함께 출간된다.

    그는 투병 중이던 지난 11일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상금 3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전액 내놓아 각박한 세상에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큰딸 영희씨는 "건강하게 생활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무런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면서 "평소 입버릇처럼 광주 공원묘지의 친정어머니(부인)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꽃을 위한 서시 전문)

    라는 영혼의 울림을 지상에 남기고 그는 `하늘의 꽃밭'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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