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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 꽃의 소묘시(詩)/김춘수 2013. 11. 23. 13:12
1.꽃이여, 네가 입김으로
대낮에 불을 밝히면
환히 금빛으로 열리는 가장자리
빛깔이며 향기며
화분(花紛)이며...... 나비며 나비며
축제의 날은 그러나
먼 추억으로서만 온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2.사랑의 불 속에서도
나는 외롭고 슬펐다
사랑도 없이
스스로를 불태우고도
죽지 않는 알몸으로 미소하는
꽃이여
눈부신 순금의 천(阡)의 눈이여
나는 싸늘하게 굳어서
돌이 되는데
3.네 미소의 가장자리를
어떤 사랑스런 꿈도
침범할 수는 없다
금술 은술을 늘이운
머리에 칠보화관을 쓰고
그 아가씨도
신부(新婦)가 되어 울며 떠났다
꽃이여, 너는
아가씨들의 간( )肝을
쪼아먹는다
4.너의 미소는 마침내
갈 수 없는 하늘에
별이 되어 박힌다
멀고 먼 곳에서
너는 빛깔이 되고 향기가 된다
나의 추억 위에는 꽃이여
네가 머금은 이슬의 한 방울이
떨어진다
너를 향하여 나는
외로움과 슬픔을
던진다(그림 : 조선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