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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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끝끝내시(詩)/정호승 2013. 11. 22. 12:23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 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하지 못했습니다. (그림 : 남택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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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강변 역에서시(詩)/정호승 2013. 11. 21. 20:52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 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 산에서 저녁 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 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그림 : 이정석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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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사랑시(詩)/정호승 2013. 11. 21. 12:20
그대는 내 슬픈 운명의 기쁨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기도하는 기도 내 영혼이 가난할 때 부르는 노래 모든 시인들이 죽은 뒤에 다시 쓰는 시 모든 애인들이 끝끝내 지키는 깨끗한 눈물 오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는 날보다 원망하는 날들이 더 많았나니 창 밖에 가난한 등불 하나 내어 걸고 기다림 때문에 그대를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대를 기다리나니 그대는 결국 침묵을 깨뜨리는 침묵 아무리 걸어가도 끝없는 새벽길 새벽 달빛 위에 앉아 있던 겨울산 작은 나뭇가지 위에 잠들던 바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던 사막의 마지막 별빛 언젠가 내 가슴 속 봄날에 피었던 흰 냉이꽃 (그림 : 김인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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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북극성시(詩)/정호승 2013. 11. 20. 22:11
신발끈도 매지 않고 나는 평생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황급히 신발을 벗는 것일까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닳아버린 줄도 모르고 길 떠나기 전에 신발이 먼저 울어버린 줄도 모르고 나 이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와 늙은 신발을 벗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아들아, 섬 기슭을 향해 힘차게 달려오던 파도가 스러졌다고 해서 바다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들아 비를 피하기 위해 어느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비가 그친 것은 아니다 불 꺼진 안방에서 간간이 미소 띠며 들려오는 어머니 말씀 밥 짓는 저녁 연기처럼 홀로 밤하늘 속으로 걸어가시는데 나는 그동안 신발 끈도 매지 않고 황급히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도대체 누구를 만나고 돌아와 저 멀리북극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