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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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 겨울 나무시(詩)/이정하 2013. 12. 29. 13:09
그대가 어느 모습 어느 이름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어도 그대의 여운은 아직도 내 가슴에 여울되어 어지럽다 따라 나서지 않은 것이 꼭 내 얼어붙은 발 때문만은 아니었으리 붙잡기로 하면 붙잡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안으로 그리움 삭일 때도 있어야 하는 것을 그대 향한 마음이 식어서도 아니다 잎잎이 그리움 떨구고 속살 보이는 게 무슨 부끄러움이 되랴 무슨 죄가 되겠느냐 지금 내 안에는 그대보다 더 큰 사랑 그대보다 더 소중한 또 하나의 그대가 푸르디푸르게 새움을 틔우고 있는데 (그림 : 강옥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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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 그대는 아는가시(詩)/이정하 2013. 12. 11. 13:11
그대는 아는가,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그대와의 만남은 잠시였지만 그로 인한 아픔은 내 인생 전체 였었다 바람은 잠깐 잎새를 스치고 지나 가지만 그 때문에 잎새는 내내 흔들린다는 것을 아는가 그대, 이별을 두려워 했더라면 애초에 사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이별을 예감했기에 더욱 그대에게 열중할 수 있었다는 것을 상처입지 않으면 아물 수 없는 것 아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네 만났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사랑했고 사랑했던 날보다 더 많은 날들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여 진정 아는가... (그림 : 하미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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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 부치지 못한 다섯개의 엽서시(詩)/이정하 2013. 12. 11. 12:55
하나. 마음속 서랍에는 쓰다가 만 편지가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대에게 내 마음을 전하려고 써내려가다가, 다시 읽어보고는 더이상 쓰지 못한 편지. 그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내 마음 한 조각을 떼어내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아는지요? 밤이면 밤마다 떼어내느라 온통 상처투성이가 되고마는 내 마음을 둘. 아침부터 소슬히 비가 내렸습니다. 내리는 비는 반갑지만 내 마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쓸쓸함이 고여듭니다. 정말 이럴때 가까이 있었더라면 따뜻한 커피라도 함께 할 수 있을텐데. 저 함께 있는 것 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할텐데. 누군가를 사랑하다는 것은 이렇듯 쓸쓸한 일인가 봅니다. 셋. 다른 사람과 함께 나란히 걷고 있는 그대를 우연히 보았던 날,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미소지었습니다. 애당초 가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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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 비오는 날의 일기시(詩)/이정하 2013. 11. 24. 18:40
그대가 날 부르지 않았나? 난 창문을 열고 하루종일 밖을 내다보았다. 비오는 이런 날이면 내 마음은 어느 후미진 다방의 후미진 낡은 구석 의자를 닮네. 비로소 그대를 떠나 나를 사랑할 수 있네. 안녕, 그대여. 난 지금 그대에게 이별을 고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 당신을 만난 날이 비오는 날이었고 당신과 헤어진 날도 오늘처럼 비 내리는 날이었으니 안녕, 그대여. 비오는 이런 날이면 그 축축한 냄새로 내 기억은 한없이 흐려진다. 그럴수록 난 그대가 그리웁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안녕, 그대여. 비만 오면 왠지 그대가 꼭 나를 불러줄 것 같다 (그림 : 조성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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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 - 비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시(詩)/이정하 2013. 11. 24. 18:38
1. 기차는 오지 않았고 나는 대합실에서 서성거렸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고 비옷을 이은 역수만이 고단한 하루를 짊어지고 플랫폼 희미한 가로등 아래 서 있었다. 조급할 것도 없었지만 나는 어서 그가 들고 있는 깃발이 오르기를 바랐다. 산다는 것은 때로 까닭 모를 슬픔을 부여안고 떠나가는 밤열차 같은 것. 안 갈 수도, 중도에 내릴 수도, 다시는 되돌아올 수도 없는 길. 쓸쓸했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언제나 연착했고, 하나뿐인 차표를 환불할 수도 없었으므로,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고 나는 버릇처럼 뒤를 돌아다 보았지만 그와 닮은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끝내 배웅도 하지 않으려는가, 나직이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비 오는 간이역에서 밤열차를 탔다. 2.밤열차를 타는 사람들에겐 저마다 사연이 있게 마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