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안도현
-
안도현 - 숭어회 한 접시시(詩)/안도현 2013. 11. 23. 13:37
눈이 오면, 애인 없이도 싸드락싸드락 걸어갔다 오고 싶은 곳 눈발이 어깨를 치다가 등짝을 두드릴 때 오래된 책표지 같은 군산(群山), 거기 어두운 도선장 부근 눈보라 속에 발갛게 몸 달군 포장마차 한 마리 그 더운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 갑자기, 내 안경은 흐려지겠지만 마음은 백열 전구처럼 환하게 눈을 뜰 테니까 세상은 혁명을 해도 나는 찬 소주 한 병에다 숭어회 한 접시를 주문하는 거라 밤바다가, 뒤척이며, 자꾸 내 옆에 앉고 싶어하면 나는 그 날 밤바다의 애인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이미 양쪽 볼이 불쾌해진 바다야, 너도 한 잔 할래? 너도 나처럼 좀 빈둥거리고 싶은 게로구나 강도 바다도 경계가 없어지는 밤 속수무책, 밀물이 내 옆구리를 적실 때 왜 혼자 왔냐고, 조근조근 따지듯이 숭어회를 썰며..
-
안도현 - 우물시(詩)/안도현 2013. 11. 23. 13:35
고여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깊은지 모르지만 하늘에서 가끔씩 두레박이 내려온다고 해서 다투어 계층상승을 꿈꾸는 졸부들은 절대 아니다 잘 산다는 것은 세상 안에서 더불어 출렁거리는 일 누군가 목이 말라서 빈 두레박이 천천히 내려올 때 서로 살을 뚝뚝 떼어 거기에 넘치도록 담아주면 된다 철철 피 흘려주는 헌신이 아프지 않고 슬프지 않은 것은 고여 있어도 어느 틈엔가 새 살이 생겨나 그윽해지는 그 깊이를 우리 스스로 잴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림 : 김영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