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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그림 : 신재흥 화백)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구절초 매디매디 나부끼는 사랑아 내 고장 부소산 기슭에 지천으로 피는 사랑아 뿌리를 대려서 약으로도 먹던 기억 여학생이 부르면 마아가렛 여름 모자 차양이 숨었는 꽃 단추 구멍에 달아도 머리핀 대신 꽂아도 좋을 사랑아 여우가 우는 추분(秋分) 도깨비불이 스러진 자리에 피는 사랑아 누이야 가을이 오는 길목 매디매디 눈물 비친 사랑아 (그림 : 노숙자 화백)
자욱이 버들꽃 날아드는 집이 있었다 한낮에 개구리 울어쌓는 집이 있었다 뉘우침도 설레임도 없이 송송 구멍뚫린 들창(窓) 안개 비 오다 마다 두멧집이 있었다
남은 아지랑이가 홀홀 타오르는 어느 역 구내 모퉁이 어메는 노오란 아베도 노란 화물에 실려 온 나도사 오요요 강아지풀. 목마른 침묵은 싫어 삐걱 삐걱 여닫는 바람 소리 싫어 반딧불 뿌리는 동네로 다시 이사 간다. 다 두고 이슬 단지만 들고 간다. 땅 밑에서 옛 상여소리 들리어라. 녹물이 든 오요요 강아지풀.
호두 깨자 눈 오는 날에는 눈발 사근사근 옛말 하는데 눈발 새록새록 옛말 하자는데 구구샌 양 구구새 모양 미닫이에 얼비쳐 창호지 안에서 호두 깨자 호두는 오릿고개 싸릿골 호두. (그림 : 김종순 화백)
노랗게 속 차오르는 배추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배추꼬리도 맛이 있었나니 눈덮인 움 속에서 찾아냈었나니 하얗게 밑둥 드러내는 무밭머리에 서서 생각하노니 옛날에 옛날에는 무꼬리 발에 채였었나니 아작아작 먹었었나니 달삭한 맛 산모롱을 굽이도는 기적 소리에 떠나간 사람 얼굴도 스쳐가나니 설핏 비껴가나니 풀무 불빛에 싸여 달덩이처럼 오늘은 이마 조아리며 빌고 싶은 고향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혀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 모스러진 돌절구 바닥에도 고여 넘치는 이 비천함이여. (그림 : 안창표 화백)
앵두꽃 피면 앵두바람 살구꽃 피면 살구바람 보리바람에 고뿔 들릴세라 황새목 둘러주던 외할머니 목수건 (그림 : 송금석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