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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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대숲바람 소리시(詩)/나태주 2013. 12. 9. 18:06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밤 사이 내려와 놀던 초록별들의 퍼렇게 멍든 날개쭉지가 떨어져 있다. 어린 날 뒤울안에서 매 맞고 혼자 숨어 울던 눈물의 찌꺼기가 비칠비칠 아직도 거기 남아 빛나고 있다. 심청이네집 심청이 빌어먹으러 나가고 심 봉사 혼자 앉아 날무처럼 끄들끄들 졸고 있는 툇마루 끝에 개다리소반 위 비인 상사발에 마음만 부자로 쌓여 주던 그 햇살이 다시 눈트고 있다, 다시 눈트고 있다. 장 승상네 참대밭의 우레 소리도 다시 무너져서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등 너머로 훔쳐 듣는 남의 집 대숲바람 소리 속에는 내 어린 날 여름 냇가에서 손 바닥 벌려 잡다 놓쳐 버린 발가벗은 햇살의 그 반쪽이 앞질러 달려와서 기다리며 저 혼자 심심해 반짝이고 있다. 저 혼자 심심해 물구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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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대숲 아래서시(詩)/나태주 2013. 11. 24. 19:05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득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국.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지는 서녘 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을 헹구는 달님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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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멀리까지 보이는 날시(詩)/나태주 2013. 11. 24. 19:04
숨을 들이쉰다 초록의 들판 끝 미루나무 한 그루가 끌려들어온다 숨을 더욱 깊이 들이쉰다 미루나무 잎새에 반짝이는 햇빛이 들어오고 사르락사르락 작은 바다 물결 소리까지 끌려들어온다 숨을 내어 쉰다 뻐꾸기 울음소리 꾀꼬리 울음소리가 쓸려 나아간다 숨을 더욱 멀리 내어 쉰다 마을 하나 비 맞아 우거진 봉숭아꽃나무 수풀까지 쓸려 나아가고 조그만 산 하나 다가와 우뚝 선다 산 위에 두둥실 떠 있는 흰구름, 저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몸 안에서 뛰어 놀던 바로 그 숨결이다 (그림 : 장철희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