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나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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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사는 일시(詩)/나태주 2017. 3. 23. 10:15
1 오늘도 하루 잘 살았다 굽은 길은 굽게 가고 곧은 길은 곧게 가고 막판에는 나를 싣고 가기로 되어 있는 차가 제시간보다 먼저 떠나는 바람에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두어 시간 땀흘리며 걷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쁘지 아니했다 걷지 않아도 좋을 길을 걸었으므로 만나지 못할 뻔했던 싱그러운 바람도 만나고 수풀 사이 빨갛게 익은 멍석딸기도 만나고 해 저문 개울가 고기비늘 찍으러 온 물총새 물총새, 쪽빛 나랫짓도 보았으므로 이제 날 저물려고 한다 길바닥을 떠돌던 바람도 잠잠해졌고 새들도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오늘도 하루 나는 이렇게 잘 살았다 2 세상에 나를 던져보기로 한다 한 시간이나 두 시간 퇴근버스를 놓친 날 아예 다음 차 기다리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길바닥에 나를 놓아버리기로 한다 누가 나를 주워가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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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오늘의 약속시(詩)/나태주 2017. 3. 23. 10:10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 발을 멈췄다든지 매미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 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난밤에 쉽게 잠이 들지 않아 많이 애를 먹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며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 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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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 사랑에의 권유시(詩)/나태주 2017. 3. 23. 10:06
사랑 때문에 다만 사랑하는 일 때문에 울어본 적 있으신지요?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오직 한 사람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밤을 꼬박 새워본 적 있으신지요? 그것이 철없음이라도 좋겠고 어리석음이라도 좋겠고 서툰 인생이라해도 충분히 좋겠습니다 한 사람의 여자를 위하여 한사람의 남자를 위하여 다시금 떨리는 손으로 길고 긴 편지를 써 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지요?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래요 한 사람의 일로 밤을 새우고 오직 그 일로 해서 지구가 다 무너질 것만 같았던 날들이 분명 우리에게 있었음을 그리하여 우리가 한 때나마 지상에서 행복하고 슬프고도 외로운 사람이었음을 부디 후회하지 마시기 바래요. (그림 : 이영철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