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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일 - 빨래집게시(詩)/시(詩) 2022. 10. 24. 12:30
연립주택 옥상 빨랫줄의 빨래집게
아기의 속옷가지를 말릴 때는
새끼 원숭이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장난을 치듯
한 손으로 빨랫줄에 매달리는 여유를 부렸고
청바지같이 무겁고 잘 마르지 않는 빨래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어떤 때는
203호 아가씨의 손바닥만 한 팬티를
물고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했고
505호 막일하는 김 씨의 낡은 운동화의 발냄새도 잘 참아냈다
무겁고 커다란 이불을 널어야 할 때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일은 홀로 감당해야 했다
비 오는 날은 내일의 끼니를 걱정해야만 했고
바람 부는 날은 일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으로 바둥대기도 했다 어쩌다
한가한 날에는 창공을 우러러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잊고 지냈던 지난 꿈들을
한두 마씩 끊어 너울너울 날려보냈다
어느 때부턴가
물고 늘어지는 힘이 슬슬 빠져나가고 겨우
빨랫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한 생애
빨랫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던
앙다문 이빨 사이로 선홍빛 피가 비치곤 했다
(그림 : 변응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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