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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석 - 누런 가방시(詩)/시(詩) 2021. 12. 19. 15:24
가방들을 두고 침묵의 마을이라 한 화가를 기억한다
그의 가방은 잘 열리지 않고
늘 구석에 놓여 있었겠지
주인의 마음처럼
지퍼란 지퍼, 멩빵이란 멜빵,
끈들은 모두 가지런히 빠짐없이
닫혀지고 꼭꼭 매여진 채
여행 중인 검은 가방들이 서울역 무궁화호 개찰구
가까운 바닥 여기저기
놓여 있다
인공 쇠가죽의 불빛 덮어쓴 위쪽은 금빛으로 빛나는데
그 아래쪽은 불룩하니 캄캄하다
가방 주위 어딘가에 있을 주인의 주머니도 가방만큼
자주 열리지 않아
뭐든 타협이 잘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로 갈 데가 있고
집요하게 뭔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바쁘게 일어설 때까지,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가방들은 완강하게 입 다물고 자리를 지킨다
안에 든 게 뭐든 제 것이 아닌
가방은 아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다
열어보려는 이도 없이 가방들은 버려진 채 떠도는
늙은이의 어깨들처럼
위가 짓눌린 채 구겨져 있다.
(그림 : 이선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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