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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진 - 당신이 먼 집에 있어시(詩)/시(詩) 2021. 10. 16. 08:59
남해 지나 하동 가는 길
바다가 연신 차창을 기웃거리고
느닷없이 길 위로 뛰어드는 파도소리에
놀란 브레이크 등이 해국처럼 꽃잎을 펼쳤다 접는다
'남해바다와 노을'이라는 간판을 걸었지만
그것들 다 안으로 들일 수 없었는지
건어물 몇 가지만 엉성하게 펼쳐놓은 상점
주인은 오솔길 끝자락에 바다 한 귀퉁이를 묶어 절벽 아래에 던져 놓았고
파도가 일렁일 때마다 굽은 길이 느슨해지거나 다시 팽팽해졌다
저녁의 해변에서 노을을 면사포처럼 쓰고
나에게로 밀려오던 당신이 먼 집에 있어
까치밥처럼 남은 몇 장 지폐로 바다와 노을을 셈하고 돌아설 때
주인은 겹겹이 밀려온 파도의 낱장으로 곱게 싼 멸치를 덤으로 내주었다
창을 열어 노을을 바른 저녁과 파도소리를 한 짐 싣는다
바퀴가 덜컹일 때마다 거울에 비친 뒤가 붉게 출렁거려서
더딘 길이 자꾸만 굽어진다
늦은 밤 멸치를 우려내 국수를 삶는 여자에게
품었던 바다와 노을을 넌지시 내민다
여자는 잠시 붉어지더니 저만치 돌아서서 펼쳐 읽는다
좀체 꺼내놓지 않던 어떤 말이 밀려갔을까
여자, 돌아선 채 돌섬처럼 꿈쩍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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