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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가랑비와 함께 흐느적거리며 걷는다
가난한 아버지들의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비처럼 한쪽 어깨는 사선으로 기울고
시한부 진단을 받고 나오는 사람처럼
헐거운 양복 헐거운 우산
헐거운 버스에 겨우 오른다
뾰족구두가 꾸욱
발을 밟고 지나간다
미안하단 말도 없이
언제나 그렇듯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그러거나 말거나
기둥 하나를 겨우 잡고
모든 걸 그만두고 싶은데
그럼 어쩌나
무얼 해서 먹고 사나
부모님 얼굴은 어찌 보나
그럼 어쩌나
그럼 어쩌나
집에 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드는데
한 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허기는 찾아와
국수를 끓인다
하얀 소면이 끓고
착하디착한 연약한 국수를
따듯한 국물에 말아
후룩 후룩
후루루 후루루
아
기운이 좀 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조금은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흐물흐물한 국수 가락이
나를 일으킨다
(그림 : 허영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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