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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 때나 설한 때나 나무 아래 바위는 내달리지 않는다
줄기를 잘라내면 그곳의 전언이 나에게 스밀 것이다
불패의 봄을 예감하며 솟대가 되는 이것은 새의 율법
뿌리에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새가 나뭇가지 위에 와서 운다
악착같이 밤이 밀려온다 어둠이 끝끝내 나에게 소홀해도 나는 어둠에게 소홀할 수 없다
내가 잠든 사이에도 나무는 자라서 사랑하고 이별하고 흔들리겠지
눈의 무게를 못 이겨 우지직 우지직 가지 꺾이는 소리 유난히 크게 들린다
달아날 수 없어 팔다리를 버린 것이다
통증이 온전히 나무의 몫으로만 남아 시린 바람을 견딘다
뿌리까지 뚝뚝 부러진 그리움이 내 안에 쌓여 앙상한 고사(枯死)가 된다
봄이 되면 어김없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벌레가 꿈틀댄다
벌레는 마지막 폐허이자 최초의 태동이다
새를 흉내 내던 내 생각이 먼 곳을 탐할 때
나무를 잘라 새의 형상을 꺼낸다
수만 평의 허공이 모두 새의 집이다
무작정 당신의 방향으로 내 안에 솟대를 놓아준다(그림 : 권옥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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