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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영 - 물을 기르다시(詩)/시(詩) 2021. 7. 18. 14:26
아무도 모르겠지만
몰랐겠지만
나는 물을 기르고 있다.
키우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씩 자랄 때도 있고
또 줄어들 때도 있지만 분명,
나는 물을 기르고 있다.
어느 날엔가 언니는
물 한 대접을 사이에 두고 웃다가
또 몰래 삼켜버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언니의 나이가 되었을 때
목련꽃 숭어리째 떨어지듯 물이 목에서
철철 흘러넘치는 날이 많았다.
제법 주름이 늘자 인생 뭐 별거 있냐고
물목의 수위 조절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두에 새콤하게 고인
갓 딴 오이의 와작거리는
딱 그만큼의 물
비온 뒤 땅 밟았을 때 물렁한 물기,
딱 그만큼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얼굴 살짝 붉힐 정도의 물
찔끔 눈꼬리 적실 정도의 물
그리고 당신에게 살짝 휘어질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물 기르고 있다.
(그림 : 윤성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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