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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희 - 할머니, 스웨터시(詩)/시(詩) 2021. 1. 10. 12:15
할머니 곁에 꼭 붙어 지낸 어린 시절, 할머니는 찬바람 부는 겨울밤에도 손에서 대바늘을 놓지 않았다
대나무 바늘이 지나는 자리마다 한 땀 한 땀 구슬 꿰듯 색색의 실로 스웨터를 짰다 뼈마디 앙상한 손가락
에서 구불구불 빛이 흘러나오듯 끝 모르는 털실들이 생의 물줄기처럼 솟아오르고 할머니의 반복되는 손
놀림으로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스웨터가 완성되어갔다 대바늘 코가 늘어나는 만큼 밤하늘 별빛 따라 어
린 나의 꿈도 피어오르고
대바늘 코 사이로 더운 입김이 골고루 섞인 스웨터를 열두 살 내 몸에 대 보던 할머니는 만족하신 듯 웃으시며 꽃을 수놓은 주머니와 단추를 달았다 옷이 완성되는 동안 졸린 눈으로 쳐다보던 나에게 씨실과
날실이 제대로 엮어져야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는 완전한 옷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이 세상 사는 일도 별
반 다를 게 없다고, 겨울 밤하늘에 가닿을 듯 눈물겨운 전언을 쏟아내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 온전히 나를 담기 위해 당신의 삶을 엮듯이 그물처럼 촘촘하고 두텁게 만든 그 스웨터를 이삿짐을 꾸리다가 발견하던 날, 자분자분 살갗 속으로 파고드는 할머니의 간곡한 말씀들이 험한
세상 헤치고 거친 바다를 건너온 내 안에 단단하게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듯이
오늘 밤도 먼 하늘에서 별빛 타고 오신 할머니, 내 흐려진 눈시울 너머 빙그레 웃고 계신다(그림 : 안호범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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