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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마냥 헛헛하게 느껴질 때 취매역으로 향하네
취매역은 도취와 몰입의 환승역; 좁고 딱딱한 나무 의자에 홀로 앉아
술병을 까네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세 병 되도록
때로 누군가의 손이 어깨에 닿기도 하는데 돌아보면 아무도 없네
그건 당연한 일 오래전에 나는 사랑을 망가뜨렸으니
이제 내게 남은 건 아릿한 슬픔과 모르핀 같은 회한
남루한 사내가 이내를 털고 들어오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파삭 늙어버린 사내를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네
나는 고개 돌려 외면하네 관계는 끈적거리는 먼지와도 같아서 따분하기 짝이 없고
오래전에 청춘을 배반했으므로 은화 서른 냥에 스승을 판 사내처럼
회한과 대작하며 마시는 동안 깜빡 잠이 드네
복숭아 꽃잎 떠서 흘러오는 취매역 폭설 쏟아지는 취매역 토네이도 휘몰아치는 취매역
울컥울컥 토악질 올라오는 취매역
비틀거리며 취매역에 내리네
자욱한 안개 매구처럼 나를 감싸네
취매역(醉呆驛) : 남춘천역 풍물시장 안에 있는 주점
(그림 : 이상권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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