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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섶 - 꼬리에 대한 가설시(詩)/시(詩) 2020. 11. 23. 17:12
고래가 포유류라는 사실은 꼬리로 증명된다
꼬리를 바짝 치켜드는 짐승의 습관이 유일하게 남아있어
바다에 살면서도 수면으로 떠올라 꼬리를 치켜드는 고래의 습속
자기를 버린 세상에 대한 애증을 그렇게 드러내버린 날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깊은 바다 속으로 잠수한다
햇볕 한 줌 보이지 않는 바닥에 엎드려
며칠 동안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식음을 전폐한다
온몸으로 깔고 앉은 꼬리를 감출수록 점점 커지는 몸뚱이
이러다가 아예 밖을 보지 못할 것 같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돌아다니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웃거리는 물속과 물 밖의 경계
한번 넘어온 국경을 다시 건너가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살던 곳에서 아무도 몰래 쫓겨난 것인지
새로운 터전을 향해 스스로 야반도주를 한 것인지
폭풍에 지워져 기록 한 줄 남아있지 않은 그의 일대기
다만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밤이면
젖몸살을 앓던 기억의 보따리를 펴고
꼬리를 까딱거리며 달려드는 어린 새끼들에게
햇빛의 DNA가 박힌 슬픔을 수유할 뿐이다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사선은 가까이에 있어도 보이지 않아
꼬리는 넘어와도 몸이 넘어오지 않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세상을 향해
오늘도 반란을 꿈꾸며 꼬리를 내밀다 사라지는 짐승 한 마리
고래의 영혼은 꼬리에 있다
(그림 : 김규비 화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