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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숙 - 숫자의 감정 시(詩)/시(詩) 2020. 8. 9. 06:43
묵묵하던 숫자 속에 감정이 살기 시작했다
일흔의 아들이 찾아오는 매월 25일 동그라미가
독거노인의 낡은 잇몸을 둥글게 웃게 하고
가난한 형의 임플란트 치료비는
외면하고 싶은 동생의 버거운 잇몸이 되던
그 숫자들, 그리움의 허기이거나 치통보다 우리 하거나
잠들지 못한 연중무휴 편의점의 최저 시급은
취업 준비생의 끈 풀린 운동화처럼 쉽게 밟히고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던 고요한 네 전화번호는
소심해진 내 어깨 깨우는 인기척으로
그 숫자들, 지나치게 불안하거나 넘치게 두근거리거나
똑 부러지게 제 생각 밝히며
날마다 스스로 진화하는 숫자들
정나미 없는 사람의 말투까지 흉내 내며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짓을 하기 시작했다
철 없이, 숫자들이 자꾸만 사람을 닮아가고
겁 없이, 숫자들이 자꾸만 감정을 드러내며
우리하다 : 신체의 일부가 몹시 아리고 욱신욱신한 느낌이 있다는 뜻의 경상도 말.
(그림 : 박운섭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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