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박수현 - 어린 봄을 업다
    시(詩)/시(詩) 2020. 4. 20. 16:49

     

    몇십 년 만에 아이를 업었다

    앞으로 안는 신식 띠에 익은 아이는

    자꾸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토닥토닥 엉덩짝을 두드리자

    얼굴을 묻고 나비잠에 빠졌다

    슬그머니 내 등을 내려와 제 길 간 어미처럼

    아이도 날리는 벚꽃잎 밟으며

    자박자박 걸음을 뗀다

    어릴 적, 어른들 따라 밤마실 갔다 올 때면

    넓은 등에 얼굴 묻는 것이 좋아

    나는 마실이 파할 즈음 잠든 척하곤 했다

    업혀서 돌아올 땐 부엉이 우는 밤길도 무섭지 않았다

    가끔 백팩이나 메는 내 어두운 등짝으로

    어린것의 온기가 전해진다

    내가 걸어온 한 생이

    고작 두어 뼘 등판 위에서 뒤집혔다는 생각

    겁 많고 무른 가슴팍 대신 갖은 상처를 받아내느라

    딱딱해진 등이 혹 슬픔의 정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득, 누가 이 말간 봄빛 한나절을

    내 빈 등에 올려놓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이가 얕은 숨을 내쉬며 옹알거렸다

    멀리서 온 그 말씀, 하르르 날아가 버릴 것 같아

    조심스레 포대기를 추슬렀다 출렁,

    한 뼘 더 팔이 길어졌다

    (그림 : 김영순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수현 - 호접란  (0) 2020.04.20
    정해영 - 찬밥  (0) 2020.04.20
    김순진 - 감자의 눈  (0) 2020.04.19
    김우식 - 라면을 끓이며  (0) 2020.04.19
    이용악 - 하나씩의 별  (0) 2020.04.18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