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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경 - 물꼬 보러 갔다가시(詩)/시(詩) 2020. 3. 19. 11:24
여우비가 슬그머니 다녀간 대낮에
거반 말랐던 빨래가 축 늘어져 있다
말매미 쓰르라미가 악을 쓰고 울어대고
산여치도 덩달아 찌직거리고 있다
집에 온 딸아이는 봉숭아 꽃잎을 모아
콩콩콩 여름을 빻고 있다
텃밭에 키 큰 옥수수수염이 붉고
오므렸던 도라지꽃이 폭폭 터진다
늘어지게 낮잠이나 자려다가
며칠 안 가본 논이 궁금하여 삽을 들고 나선다
논두렁을 걸어가는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뜨건 날 피사리하던
마을 동생이 부른다
어디에 가든 늘 숨겨논 술이 있어
오늘은 어디에서 나오나 봤더니
논 수멍머리에서 소주 한 병을 들고 나온다
형님 미지근한 술은 못먹유
이래 봐도 시아시 하나는 끝내준당께요
논물이나 봇물이나 미적지근하기는 매한가지인데
허풍이 대단하다
반병씩 노나 먹고 일어서는데
수리봉 하늘이 수상쩍다
들판으로 우르르 천둥이 친다
찬바람이 뜨신 바람으로 불어온다
소나기가 퍼붓는다
채찍비가 얼굴이고 등짝이고 후려친다
피할 도리가 없다
어떤 놈 소행인지 묶어논 풀에 발이 걸려 꼬꾸라졌다
옷 입은 채로 물속에 뛰어든다
고무신이 떠내려갔다
까진 팔꿈치에 피가 난다
물꼬 보러 간다는 풍신이 중얼중얼 돌아온다
호랭이만 신명나게 서너 번 장가 간 날이었다
(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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