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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시(詩)/시(詩) 2019. 10. 15. 09:50
느티, 하고 부르면 내 안에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느릿느릿 얼룩이 진다 눈물을 훔치듯
가지는 지상을 슬슬 쓸어담고 있다
이런 건 아니었다, 느티가 흔드는 건 가지일 뿐
제 둥치는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느티는 넓은 잎과 주름 많은 껍질을 가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발음하면
내 안의 어린 것이 칭얼대며 걸어온다
바닥이 닿지 않는 쌀통이나
부엌 한쪽 벽에 쌓아둔 연탄처럼
느티의 안쪽은 어둡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느티는 밥을 먹지도 않고
온기를 쐬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한번도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저 현관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하루 종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도 아니다, 느티는 정자나무지만
할머니처럼 집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우리 집 가계(家系)는 계통수보다 복잡하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짓는다
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
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안이다
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그림 : 문정숙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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