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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웅 - 사신 (私信)시(詩)/시(詩) 2019. 10. 15. 09:47
바람 심한 날이구요
속수무책 잎이 져서
한 시절 저물었음을 알리네요, 헐렁하게
혼자 저녁을 사먹은 날은
그만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어요
낙엽을 덮어쓰고
머리에서 새싹 돋을 때까지
긴 겨울잠을 잤으면
그래서 속잎과 겉잎 바투 쏟아내며
볕과 그늘을 거느린 일가를 다시 이루었으면
시시껍절한 소리나 주워섬기며
한 시절을 시시껍절로 키워내는 동안
저 나무의 보굿이 되었으면 했어요
당신과 만나 우리가 잡은 손이 울짱을 이루고
닿은 가슴이 바람벽을 할 때까지
나는 세 든 마음이지요
생각하는 사람 자세로 이파리를 털어내는
저 나무처럼 가뭇가뭇 갈 곳 없어요
분식집에서 떡라면을 먹고 나와
떡살처럼 결 고운 당신 무늬를 생각하며 돌아설 때
중앙선에 밑줄 그은 고양이눈 따라
쓸려가는 가랑잎들 보았어요
바람 심한 거리에서 마지막 엽서를 띄웁니다(그림 : 김기홍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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