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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식 - 갈대가 선 자리시(詩)/시(詩) 2019. 10. 8. 09:29
처음엔 아무데나 자리만 있으면 좋았다
잔뿌리 내려 조금씩 키를 키우고
멀리 꿈을 둔 꽃대만 올려도 좋았다
어느 날 그자리가 내 자리가 아니고
모두들 더 좋은 자리를 찾아 떠다닌다는 걸 알고서
갈대는 어디에 서야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뿌리가 깊어지면 떠나기 어렵다는 생각도 했다
좋은 자리를 찾아 떠다니던 것들이
뿌리조차 내리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것을 보고
갈대는 지금 선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지만
같이 뿌리를 얽고 사는 것들을 만나
모여 서서 편안히 흔들리기도 했다
같이 소리치면서도 점점 쓸쓸해지던 어느 날
하얀 꽃들이 제 몸에서 피어올라
후련하게도 강 건너 편으로 날았다
갈대는 그 꽃들에 꿈을 매달아 보내놓고
그제야 무거운 고개를 숙였다
그날 지는 해는 금빛으로 강변을 꾸며주었고
갈대는 제가 쓰러져야 할 자리가
제일 좋은 자리라고 되뇌고 있었다(그림 : 박명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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