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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로를 걷다가
너는 생각난 듯 털복숭이 과일이 잔뜩 쌓인
어떤 리어카 앞으로 내 손목을 끌었는데
연필깎이 칼이 여럿 달린 그 앞에서
너는 한 개를 잘도 깎아
진물 아린 초록을 내게 내밀었는데
여름이 꼭 그렇게 생겼을 거야
다래랑도 비슷하고
리어카 앞에는 우리 말고도
돌돌돌 그것을 까서 먹던 사람들 여럿 있었는데
양볼 가득 알밤을 품은 다람쥐들 같았는데
털복숭이들은 리어카 밖으로 기어나올 듯 고물거렸는데
가만 있어도 잇새로 신웃음이 배어나왔는데
이제 동성로 한복판에 그런 리어카는 없다
간혹 보이는 털복숭이들은 유리 진열장속에서
알록달록 조명을 입고 있다가
홀라당 털옷이 벗겨지기 무섭게
믹서기에 무지막지 갈릴 뿐
이제 동성로 한 복판에서 만나도 너는 그것을 사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깎아주지 않는다
그때처럼 신 침을 흘릴 수는 있어도
우리에게 다시는 초록이 몸을 내밀지 않는다
털복숭이 리어카가 사라진 동성로
한때 그 속에 명징한 초록이 있었다
동성로(東城路) : 대구광역시 중구의 법정동이자, 대구역네거리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구간에 조성된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번화가의 명칭이다.
행정구역 상으로는 법정동 동성로1가~3가에 해당하며, 행정동명으로는 동성로1~2가가 성내1동, 동성로3가는 성내2동에 해당한다.
과거 대구읍성의 성곽이 있었으나, 성곽이 사라진 자리가 도로가 되었고, 그 성곽의 동쪽에 해당하는 터는 현재의 '동성로'가 조성되었다.
따라서 명칭이나 상권 자체로는 100년이 훨씬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 : 김성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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