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연호 -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시(詩)/강연호 2018. 4. 12. 19:40
지리산 산동 마을로 산수유 사러 갔습니다
산동 마을은 바로 산수유 마을이고
그 열매로 차를 끓여 마시면 이명에 좋다던가요
어디서 흘려들은 처방을 핑계 삼았습니다만
사실은 가을빛이 이명처럼 넌출거렸기 때문입니다
이명이란, 미궁 같은 귓바퀴가 소리의 출구를 봉해버린 것이지요
내뱉지 못한 소리들이 한꺼번에 귀로 몰려
일제히 소용돌이치는 것이지요, 이 소리도 아니고 저 소리도 아니면서
이 소리와 저 소리가 한데 뒤섞이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이명은 이명이고 산수유는 산수유겠지만
옛날에는 마을의 처녀들이 산수유 열매를 입에 넣어
하나하나 씨앗을 발라냈다던가요
산수유, 하고 입안에서 가만가만 소리를 궁글려보면
이명이란 또한 오래전 미처 못다 한 고백 같은 것이어서
이제라도 산수유 씨앗처럼 간곡하게 뱉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붉은 혀와 잇몸 같은 열매가 간절했답니다
어쩌면 이명이 낫는 대신, 지난봄의 노란 꽃잎마냥 눈이 환해지거나
열매처럼 붉은 목젖이 자랄 수도 있었겠지요
마을은 한창 산수유 열매를 따서 널어 말리는 중이었습니다
씨앗을 들어낸 뒤 마당이나 길바닥에 펼쳐놓은 열매들은
넌출거리는 가을빛에 쪼글쪼글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문득, 장롱에 차곡차곡 개켜 넣은
철 지난 옷가지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처럼 서글펐답니다
이제 돌아가면 오래전 쑥뜸 자국 같은 한숨 한번 몰아쉰 뒤
이명보다 깊이 잠들 수 있을는지요
산수유 사러 산수유 마을에 갔습니다
(그림 : 전은순 화백)
'시(詩) > 강연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연호 - 월식 (0) 2018.08.03 강연호 - 나도 왕년에는 (0) 2018.07.16 강연호 - 여반장 (0) 2018.03.17 강연호 - 제기동 블루스 1 (0) 2017.12.27 강연호 - 물웅덩이 (0) 2017.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