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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규 - 길을 가다가 길을 만난다시(詩)/시(詩) 2017. 12. 16. 14:06
길을 가다가 길을 만난다
남은 길은 점점 좁아지고
지나온 길은 일도 없이 굽는다
굽어 형체를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길은 앞으로만 벋어 나를 유혹한다
가야할 지점도 없이
가야할 까닭도 없이
그러나 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즐겁다
길 속으로 속으로 걸어들어가
그 끝에 닿지 못할 것을 나는 알고 있으나
길을 가다가 길을 만난다
들풀 하나 없는 회색(灰色)의 길을
나는 뒤로만 간다
그게 아닌데 그게 아닌데
나는 자꾸 길에 걸려 넘어지고
길은 언제나 나를 앞질러 달려가고
그러다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굽은 목숨에 끌려가는데
길 위에서건 길 아래서건
시간은 정지되어 있다 위태로이
그림자 훌훌 벗어던지며
나도 살기 위해 길 속으로 숨어 다닌다
길은 낮은 곳으로 다른 길을 열어두느니
휘파람으로 휘파람으로
나는 어두워진 골목길을 걷는다(그림 : 장용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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