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지영 - 너를 기다린다고는 했지만시(詩)/시(詩) 2017. 12. 11. 12:27
너를 기다린 게 아니었나 보다.
너를 위해 오랫동안 마음을 갈고, 유리를 골라내어 작은
씨앗 하나도 심지 않았으니
너를 기다린 게 아니었나 보다.
오랜 가뭄 내내 물 한 번 주지 않고
싹이 돋아나는 걸 지켜보지도 않고
그래도 돋아난 넓은 그늘 아래 네 자리 하나 마련하지 않았으니굵고 실한 가지마다 노란 등을 걸어 놓지도 않았으니
나는 너를 기다린 게 아니었나 보다.
네가 온다고 자랑하고, 네가 온다고 외출도 않고, 네가
오나 보려고 문을 열어 놓고, 큰 길이 보이게 활짝 열어 놓
고, 네 기척을 들으려 음악도 꺼놨는데
사실은 너를 기다린 게 아니었나 보다.
문을 등지고 앉아 문 쪽은 보지도 않고
가끔 문이 열려 있다는 걸 잊기도 하고
섬광 같은 봄이 지나기도 전에
네가 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누군가 온다는 걸 잊어버리고
내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고(그림 : 윤위동 화백)
'시(詩) >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병도 - 정거장 (0) 2017.12.12 나혜경 - 담쟁이덩굴의 독법 (0) 2017.12.11 이태선 - 빈집으로 보내는 가을 편지 (0) 2017.12.11 권혁웅 - 기차는 여덟시에 떠나네 (0) 2017.12.11 박미라 - 만리포연가 (0) 2017.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