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희덕 - 낯선 편지시(詩)/나희덕 2017. 10. 29. 17:57
오래된 짐꾸러미에서 나온
네 빛바랜 편지를
나는 도무지 해독할 수가 없다
건포도처럼 박힌 낯선 기호들,
사랑이 발명한 두 사람만의 언어를
어둠 속에서도 소리내어 읽곤 했던 날이 있었다
그러나 어두운 저편에서
네가 부싯돌을 켜대고 있다 해도
나는 이제 그 깜박임을 알아볼 수 없다
마른 포도나무 가지처럼
내게는 더 이상 너의 피가 돌지 않고
온몸이 눈이거나
온몸이 귀가 되어도 읽을 수 없다
오래된 짐꾸러미 속으로
네 편지를 다시 집어넣는 순간
나는 듣고 말았다
검은 포도알이 굴러떨어지는 소리를(그림 : 최정길 화백)
'시(詩) > 나희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희덕 - 비 오는 날에 (0) 2018.04.14 나희덕 - 이따금 봄이 찾아와 (0) 2018.03.31 나희덕 - 내 것이 아닌 그 땅 위에 (0) 2017.08.06 나희덕 -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 (0) 2017.05.17 나희덕 - 두고 온 집 (0) 2016.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