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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살 가슴앓이
사어(死語)들만 수북히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그림 : 한희원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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