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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효근 - 사다리 사용법시(詩)/복효근 2017. 9. 2. 12:54
사다리는 필요할 때 오르는 물건이다
다리라고 밟는 그것이
실은 다리가 아니라 사다리의 어깨임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사다리는 그의 어깨를 누군가의 발밑에 내어준다
누군가의 어깨를 밟을 때는
그 어깨의 부실 여부를 탓하기 앞서
자신의 체중과 체적에 유의해야 한다
열 칸짜리 사다리를 네 칸만 올라가도 될 때가 있다
너무 높이 올라가서는
내려갈 사다리가 보이지 않기도 하다는데
(일부러 보지 않는다는 설도 있다)
적절한 위치까지 오르는 것만큼
알맞은 때에 내려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사다리는 내려갈 때 더 필요한 물건인지도 모른다
전망을 보기 위해 사다리를 오르는 일은 없는데
전망에 도취하여 왜 올라왔는지 잊는 경우가 있다
못을 박을지 못을 뽑을지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더 절실한 그 누군가 올라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을 땐
그 즉시 내려오는 것도 중요한 미덕이다
올라가 있을 때
누군가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올라갈 곳이 있음에도
사다리가 없을 때보다 더 난감하기 때문이다
(평생 주소를 허공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더러 있다)
다시 내려올 때는
마음을 저 위에 두고 와서는 안 된다
사다리는 강물 건너는 뗏목과 같아서
다 내려온 뒤엔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는 안 된다
내려다보는 데 길들여져서 아무 때고 아무 데서나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려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내려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
저를 받쳐준 사다리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앞을 보고 올라갔어도
뒷걸음으로 내려와야 한다
사다리건 사람이건 다리를 붙이고 살아야 할 곳은
또 같은 바닥임을 잊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림 : 방정아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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