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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호승 -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시(詩)/정호승 2016. 12. 15. 14:31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 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 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 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그림 : 조광기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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