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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 - 무인등대시(詩)/정호승 2016. 11. 30. 13:06
등대는 인간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설악을 등지고 방파제에 앉아
허겁지겁 활어회를 먹는 인간들이 싫었던 것은 아니다
외롭고 쓸쓸한 갈매기들에게 소주 한 잔 건네지 않고
저 혼자 술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들이 마냥 미웠던 것은 아니다
바다의 상처가 섬이 된 줄 모르고
해가 지도록 바닷가에 앉아 모래를 헤아리다가
결국 모래가 되어버린 인간들이 결코 안타까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평생 감동없는 밥을 먹는 인간들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었을 뿐이다
속초항으로 돌아오자마자 집어등을 끄고 코를 골며 자는
저 지친 오징어잡이 배들을 설악으로 끌고가 잠들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오징어와 명태와 고등어와 또 넙치들이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다정히 불을 밝히다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고요히 늙어가기를 바랐을 뿐이다
진정으로 살아보지도 않은 채 죽어간다는 것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등대는 바다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인간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그림 : 김성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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