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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태 - 정수사 가는 길시(詩)/김선태 2016. 4. 30. 21:07
늦가을, 정수사 깊숙히 꼬부라져 들어간 길목에 서 있었습니다.
삶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더냐고 혼자 중얼거릴 때,
저 길목 늘어선 늙은 바위들은 무어라 말을 건네주지 않았습니다.
삶이 무어라고 말하면 이미 삶은 거기에 없다는 듯,
풍경 하나를 제대로 만나려면 그 풍경과 몸을 바꿔야 한다는 듯,
비밀을 미리 탐하려는 자의 우매를 이끼 낀 세월의 무게로 지긋이 눌러버렸습니다.
정수사 깊숙히 꼬부라져 들어간 길 위를 나도 아련히 꼬부라져 들어가노라면,옴팍진 산기슭마다 옹기종기 집들이 모여 있고,
묵묵히 세월을 견뎌온 사람들이 아랑곳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저수지 위를 느릿느릿 소요하는 바람들이며, 산허리에 걸리는 땅거미,
머언 계곡을 헤매다 되돌아온 메아리도 다들 조금씩 얼굴이 야위었습니다.
정수사 깊숙히 꼬부라진 길을 터벅이며 절에 다다를 무렵,어슴어슴 저녁이 내리고 산어깻죽지 위로 달이 뜨더니,
소복한 산길이 하나 술에 취한 듯 비틀비틀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늙은 대처승과 함께 가을밤이 깊었습니다.
이윽고 절간의 넉넉한 고요 속으로 콩알만한 마음이 들어가 이부자릴 펴고 누웠습니다.
(그림 : 김동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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