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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마음 어두운 밤을 위하여시(詩)/황동규 2016. 3. 16. 00:49
세상 사는 일, 봄비 촉촉이 내리는 꽃밭이기도 하고
피톤치드 힘차게 내뿜는 여름 숲이기도 하지만
모르는 새 밝아지는 단풍 길
나무들이 따뜻이 솜옷 껴입는 설경이기도 하지만
간판 네온사인 앞쪽 반 토막만 켜 있는
눈 내리는 폐광촌의 술집이기도 하다.
방 한쪽을 밝히는 형광등 불빛 아래
도토리묵 한 접시와 반쯤 빈 소주병
그리고 술잔 하나 달랑 놓고 앉아 있는 사내,
창밖에 눈 내리는 기척
그 너머론 신경 쓰지 않는다.
눈바람에 꼬리가 언 채 들려오는 밤기차 소리,
영월로 나갈 차인가
아니면 이 거리에 코 박고 잘 차인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그만인 소리엔
마음을 얹지 않는다.
들짐승이 달려와 등 비비대듯 문짝 덜컹덜컹 흔들던 눈바람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지고
가까이서 뉘 집 갠가 혼자 컹컹 짖다 만다.
형광등이 슬그머니 꺼졌다가 다시 단출한 술상을 내놓는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떨치기 힘든 것은
이런 뜻 없는 것들!
허리를 바로 세우며 사내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래도 세상의 꼼수가 안 통하는 게
바로 이 저체온(低體溫) 슬픔, 이런 뜻 없는 것들이 아닐까.
(그림 : 오치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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