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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팥죽을 쑤어먹고 나면 상(床)머리에서 아버지 늘 말씀했다
내일 모래 글피가 내빌눈이 오는 날이구나, 씨릉씨릉 싸락눈이 재게 휘뿌릴 때도 있었지만
그날은 새벽부터 정말 내빌눈이 왔다
아침부터 눈 발자국을 파며 아버지는 솜바지 저고리 남바위에다 흰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고
나는 쥐뿔벙거지인 난이에 털목도리를 뒤집어 쓰고 진외갓집 진할머니 진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진외갓집은 아침부터 내빌잔치를 하느라 들썩거렸다.
재재당숙모 어린 쪼막손이들까지 나와서 눈을 치느라 부산했고
진외숙모와 재재당숙모는 디딜방앗간에서 풀맷돌에 물켜진 날콩을 갈고 있었다
진외삼촌이 바닷가 염전 구덕에서 길어온 간수를 치기 전, 가마솥에서는 콩물이 끓어 넘쳐 또 비린내가 진동했다
나도 쪼막손이들 틈에 끼어 눈을 치웠는데 진할머니는 장독간의 그 장항아리 뚜껑마다
고봉밥처럼 쌓인 눈을 질옹박지에 퍼담아다 토광 속의 큰 물항아리에 쟁이고,
내가 치맛귀를 잡고 뭣해 하고 물으면 여름에 마실 내빌물을 만든다고 했다
내빌물은 한여름에도 감로수와 같이 달고 시원하다고 했다
또 진외삼촌이 통영인가 가덕도 어디쯤 가서 사왔다는 내 키만한 대구국을 끓이고
저녁에는 온식구가 모여 순두부 떡에 대구국을 먹었는데 그것을 내빌 잔치국인 대구심니라고 했다
그리하여 대구국을 푸지게 먹고나면 밤에 진할머니는 질옹박지에 감주를 퍼왔는데 또 그것을 내빌감주라고 했다
절이 잘도 삭은 감주에 동동 대추살로 다진 고명이 떠돌았는데 그것을 대추란이라고도 했다
순두부 떡에다 대구국보다 진할머니가 내빌물에 진달래 마른 꽃잎을 엿질금 가루로 섞어 빚었다는 감주가 더 맛있었고
그 중에서도 대추란이 나는 제일 맛 있었다
지금도 염천 무더위에 자판기의 ‘외갓집깡통식혜’를 꺼내들 때가 있는데
진할머니의 그 머릿결에 자르르 흐르던 동백지름 냄새와 함께 대추란을 꼭 한번만 내빌날 먹어봤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빌눈: 동지 뒤의 3일째 되는 술일戌日이나 미일未日에 오는 눈
(그림 : 림용순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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