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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일근 - 모든 기차는 바다로 가고 있다
    시(詩)/정일근 2015. 5. 24. 00:40

     

     

    호남선 철길이 익산역에서 슬그머니

    남쪽바다로 전라선을 풀어 놓는 것은

    그건 기차가 바다를 그리워해서이다.

     

    호남들판 동서로 가로질러갈 때

    지평선 바라보며 입 꾹 다문 기차가

    임실 남원 곡성 구례 지나며

    기적소리 점점 요란해지는 것은

    그건 기차가 바다내음을 맡아서이다.

     

    그 때 누군가 안절부절 못한 채

    킁킁거리며 차창을 내다본다면

    그 사람은 지금 바다로 가고 있다

    꿈꾸는 얼굴로 종착역을 기다리며

    기차표 한 장 꼭 쥐고 있다면

    그 사람도 지금 바다로 가고 있다.

     

    날개 접고 막차로 야반도주한 갈매기가
    새벽 첫차 타고 와 다시 날개 펴는 바다
    서대 낙지 볼락 멸치 주꾸미 갯장어가
    남부여대 보따리 이고 지고 이사 갔다, 언제

    돌아왔는지 제 새끼 가득 치고 사는 바다

    젊어서 달아난 푸른섬, 섬들이

    속속 귀항해 다도해가 섬이 되는 바다

     

    분노도 이별도 슬픔도 눈물도

    다시는 찾지 않겠다, 이 악물고 떠났다

    저녁높 붉은 얼굴로 아프게 스며들어

    무릎 끓고 고해성사 하는 바다 있어

    길 잃고 발 아픈 사람의 꿈이란 꿈은

    기차를 타고 바다로 돌아가서는

    날마다 싱싱한 지느러미를 단다.

     

    떠나는 바다가 아니라 돌아오는 바다

    무덤의 바다가 아니라 요람인 바다

    늙은 바다가 아니라 늘 처녀인 바다

    한 사람의 바다가 아니라 우리의 바다

    바라보는 바다가 아니라 마주보는 바다
    모든 것 다 받아주는 바다가 거기 있어
    기차는 약속처럼 바다로 돌아간다

     

    기차가 종착역인 여수역에 닿기도 전에
    맨발로 달려오는 누님 같은 푸른 바다

    새파란 수평선 파라솔로 활짝 펼치고

    동백꽃처럼 기다리는 애인 같은 붉은 바다

    주머니 텅텅 빈 실패한 당신의 인생일지라도

    으스러지도록 껴안아주는 뜨거운 바다가

    플랫폼까지 마중 나와 출렁, 출렁거린다.

     

    나는 오래전 여수바다에서 사랑했으니

    여수(麗水)를 여수(旅愁)의 동음이의어로 읽던

    서른의 서러운 내가 쉰내 나는 나를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그 때 읽다만 그 시집 밑줄 친 그 페이지를

    여수바다로 펼쳐 놓고 기다리고 있다.

     

    펑펑 울고 싶을 때 돌아가라

    용서받고 싶을 때 돌아가라

    또다시 사랑하고 싶을 때 돌아가라

    전라선 기차를 타고 돌아가라

    낡은 여행 가방 가득 상처 쓸어 담고

    바다를 만나면 허물없이 바다가 되는

    칸칸 그득그득 생 소금 같은 사람 채워

    모든 기차는 바다로 가고 있다

    (그림 : 김지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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