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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광규 - 지족해협에서
    시(詩)/공광규 2014. 9. 21. 19:20

     

    갯가 푸조나무 아래서 가을단풍을 등불 삼아

    향교에서 빌려온 『주자어류』를 읽다가 내려놓고

    통무를 넣고 끓인 물메기국 한 그릇을 비웠습니다

    해안을 한참 걸어가 만난 곳이 지족해협이라던가

    연을 날리는 아이들과

    굴과 게와 조개와 멍게를 건지고

    갈치와 전어와 쭈꾸미를 잡는 노인들을 만나

    이곳 풍물을 묻고 즐거워하였습니다

     

    갈대를 엮어 올린 낮은 지붕에는

    삶은 멸치들이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모습을 닮았더군요

    아하, 이곳에서는 멸치를 미르치라 부른다는데

    용을 미르라고 부르니 미르치는 용의 새끼가 아닐는지요

    미르라고 부르는 은하수 또한

    이곳 바다에서 올라간 멸치 떼가 아닐는지요

     

    참나무 말뚝을 박은 죽방렴 아래에서는

    남정네들이 흙탕물에 고인 멸치를 퍼 담고 있었습니다

    흙탕물 바가지에 담긴 멸치들을 보면서

    인간의 영욕이라는 것이 밀물 썰물과 다르지 않고

    정쟁(政爭)에서 화를 당하는 것은 빠른 물살을 만나

    죽방렴에 갇히는 재앙과 같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삶기고 말라가는 지붕 위의 멸치와 다름이 없는 이 몸은

    남해의 물을 다 기울여도 씻지 못할 누명이거늘

    오늘 밤, 밝은 스승과 어진 벗이 그리울 뿐입니다.

    *『사씨남정기』구절에서 인용

    (그림 : 신종식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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