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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경림
    시(詩)/신경림 2015. 8. 23. 16:55

    신경림(申庚林, 1936년 4월 6일~) 시인

    충청북도 충주시(당시 충청북도 중원군)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 영문과를 중퇴하였으며, 1956년문학예술》 잡지에 〈갈대〉를 비롯한 시들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한때 고향에 내려가 지내다가 다시 서울로 와 잡지사·출판사 등에 취직해 지내며 시작을 중단했고, 1971년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농무(農舞)〉,〈전야(前夜)〉,〈서울로 가는 길〉 등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재출발 이후 그의 시들은 '시골의 흙냄새에 묻어서 풍기는 생활의 땀냄새와 한(恨)과 의지 등'이 짙게 풍겨 이른바 민중시인의 이름을 얻게 했다. 농민문학·민중문학 등을 주제로 평론들도 발표하였다.

    주로 농촌 현실을 바탕으로 농민의 한(恨)과 울분을 노래했다.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1955~56년 〈문학예술〉에 시 〈낮달〉·〈갈대〉·〈석상〉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러나 곧 건강이 나빠져 고향으로 내려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다시 서울로 올라와 현대문학사·휘문출판사·동화출판사 등에서 편집일을 했다. 한때 절필하기도 했으나 1965년부터 다시 시를 쓰기 시작하여 〈원격지〉(동국시집, 1970. 1)·〈산읍기행〉(월간다리, 1972. 8)·〈시제 詩祭〉(월간중앙, 1972. 12) 등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초기시에서 보여준 관념적인 세계를 벗어나 막연하고 정체된 농촌이 아니라 핍박받는 농민들의 애환을 노래했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 農舞〉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시집으로 〈새재〉(1979)·〈달넘세〉(1985)·〈남한강〉(1987)·〈우리들의 북〉(1988) 등을 펴냈고, 그밖에 평론으로 〈농촌현실과 농민문학〉(창작과 비평, 1972. 6)·〈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마당, 1982. 6)·〈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오늘의 책, 1984. 3) 등을 발표했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다. 1992년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고 있다.

     

    흔히 신경림 시인 하면 1971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농무」를 떠올리게 되고, 당대의 주류 시단과 달리 농촌의 현실을 소재로 농민의 소외된 삶을 그리면서 한국 현대문학사에 농민문학 또는 민중 시의 단초를 연 대표적 작가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러한 평가는 그의 첫 시집에 실린 『농무』에 실린 작품들의 대부분이 스스로가 나고 자란 농촌을 무대로 자신의 체험과 더불어 거기에 사는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또한 그의 시들이 오랫동안 한국인의 주된 정서를 형성했던 농촌을 그 배경으로 하여 농민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실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평가로 이어진 바 있다. 그리고 이것은 등단 이후 십여 년간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가 1965년 《한국일보》 지상에 발표한 「겨울 밤」이 그 좋은 예에 해당한다.

     

    들과 산은 온통 하얗구나. 눈은
    펑펑 쏟아지는데
    쌀값 비료값 얘기가 나오고.
    선생이 된 면장 딸 얘기가 나오고.
    서울로 식모살이 간 분이는
    아기를 뱄다더라. 어떡할거나.
    술에라도 취해 볼거나. 술집 색시
    싸구려 분 냄새라도 맡아 볼거나.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
    - 「겨울 밤」 중에서

    위 시에서 시인은 농한기인 한겨울 밤에 필시 소농민들이 주축을 이루는 "우리"들이 "묵내기 화투를 치"며 장터의 주막집이 가까운 "협동조합 방앗간 뒷방에 모여" 내년 농사 걱정과 마을 사람들의 이런저런 동향을 나누는 모습을 그리듯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우리의 슬픔을 아는 것은 우리뿐"이라는 구절이 보여 주듯이 가난하고 소외된 농민들 간의 짙은 연대감 또는 고립감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농무」)라든가,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빚 얘기"(「파장」)라는 표현이 보여 주듯이 근대화 또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서 궁핍해진 농민들의 애환과 분노가 잘 드러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해 첫 시집 『농무』의 세계가 당대의 보편적인 농촌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리고 바로 그것은 그의 대표 시 가운데 하나인 「농무」가 잘 말해 준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농무'는 농업 노동과 관련되어 있는 세시놀이의 하나로서 힘겨운 노동의 피로를 풀려는 '농악무'가 아니다. "징"과 "꽹과리" 등 소도구들과 "고갯짓" 등 춤 동작들이 여전히 '농악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 이러한 농무가 행해진 곳은 농업 현장이 아닌 "학교" "운동장"이며, 특히 "쇠전"과 "도수장"이 있는 장터를 향할 때 더욱 "신명"을 낸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신경림의 시 속에 등장하는 농촌은 두레와 같은 집단 노동이 행해지던 일반적인 농촌과 일정한 거리가 있다. 그곳 역시 농업이 지배적이라고 할지라도, 그야말로 "발버둥"쳐도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가 전부인 "산구석"에 불과하다. 그래서 "닭"이나 "돼지"(「겨울밤」) 등을 키우며 부업을 해야 하거나 "돌이 날으고 남포가 터지"는 "외딴 공사장"(「원격지」)을 찾아가야 하는, 농업을 기반으로 하되 오일장에서 매매업을 겸하거나 광산의 일용 노동을 병행할 수밖에 없는 빈한한 산촌에 더 가깝다.
    바꿔 말해, 그의 시집 『농무』가 당대 농촌의 현실과 농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작품이라는 평가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특히 이것은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파장」)라든가 혹은 "도시의 / 소음이 그리운 외딴 공사장"(「원격지」), 그리고 "궂은 날만 빼고 아내는 매일 / 서울로 새로 트이는 길을 닦으러 나가고"(「동면」) 등의 구절에서 보여 주듯이 도시나 서울 지향적인 태도에서도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시에 단지 농민이 아닌 광산 노동자, 부랑 노동자들이 상당수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단적으로 『농무』가 당대의 피폐해진 농촌 현실과 농민의 아픔을 일정 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농민문학 또는 농촌문학의 전형으로 손꼽히는 것은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신경림의 시 세계가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은 농민을 비롯한 소외된 자들의 분노와 좌절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학대하는 자와 학대받는 자"(「이 두 개의 눈은 - 어느 석상의 노래」)를 구별하면서 "누가 가난하고 / 억울한 자의 편인가"(「전야」)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그가 딱히 농민들이 아니더라도 권력자나 가진 자의 편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과 민중의 편에 서고자 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으며, 후일 그러한 노력은 이른바 민중문학 또는 리얼리즘 문학의 도화선이 된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신경림의 시는 우선 읽고 이해하기 쉽다. 첫 시집 『농무』에 붙인 백낙청의 발문대로 시 또는 문학에 대한 특별한 교양이나 공부가 없는 사람이라도 부담감 없이 접근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른바 밑바닥 인생과 이름 없는 자들이 펼쳐 내는 삶의 파노라마가 때로 분노와 슬픔을 자아내는가 하면, 어느새 눈물 나는 웃음과 해학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한결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고향 사람들과 산동네 주민들과 허름한 목로주점이나 장터와 같은 노상에서 마시는 텁텁한 막걸리 한 잔과 정담 속에 오갔을 삶의 애환과 고통이 그의 시 전면에 녹아들어 있다.
    신경림 시인은 그렇듯 민중의 삶에 깊이 뿌리박은 채 거기서 우러나온 시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민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난해한 시를 배격했다. 철저히 민중의 눈높이에 맞춰진 시 세계를 지향했으며, 나아가 민중 또는 서민들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나라를 꿈꾸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현대가 고립되고 소외된 이웃을 양산하는 개인주의 사회라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다. 또한 매스미디어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더욱더 사람들 간의 인간적 교류나 교감이 멀어져 간다는 생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즉 그의 쉬운 시가 결국 시의 하향 평준화 또는 대중 추수주의라는 일부의 비판을 들으면서까지 민중이 이해할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일관되게 써 나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당대의 문학이 일부 선택된 소수의 독점물이 되고 있으며, 특히 자족적이고 난해한 시들이 당대의 현실적인 불평등과 정치적인 핍박을 외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감과 대결 의지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 그가 누구나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민중의 생활 언어와 그들의 희로애락을 주된 소재 또는 주제로 삼은 것은, 서구 지향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당대의 시인 또는 작가들 작품 속에 민중 또는 대중에 대한 지적 오만 또는 경멸이 들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신경림의 시는 공간적으로 고향 산천과 광산, 강변과 들판, 시골길과 산동네 등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그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로 농민과 방물장수, 부랑아와 아편쟁이, 일용 노동자와 도시 빈민 등이 대부분이다. 설령 그의 시는 서울이라는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더라도 전(前)자본주의적인 공동체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으며, 그 사회의 문화와 가치 규범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또한, 그의 시 속에는 서로 간의 끈끈한 유대와 호혜적인 삶의 양식이 지배했던 공동체적 인정과 친애의 정서가 살아 있는 세계에 대한 갈망이 내면화되어 있다.
    주로 그의 초기 시에서 곧잘 확인할 수 있는 일말의 절망감이나 허무감, 분노감과 공격성이 그 증거다. 즉 이러한 상반된 감정들은 급속한 자본주의화 또는 근대화로 인한 공동체의 상실이나 붕괴와 맞물려 있으며, 그에 따른 공동체적 질서나 가치 규범의 회복에 대한 염원과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그에게 있어 급격한 산업화 또는 서구화는 오랫동안 유지해 온 민족·민중 공동체를 파괴하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상호 간의 연대감과 협력이 살아 있는 공동체적 세계를 그 대안의 하나로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서구적 시민사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냉혹한 이해관계나 이익 추구로 이어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개인적 권리를 우선시하는 자본주의적 자유주의보다 집단적인 신명과 인정, 연민과 배려가 중심이 되는 지역적인 공동체를 그 이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예컨대 역사와 시대 앞에서 "늘 당당하고 떳떳"하고자 했지만, 어느 날 "거울을 보다가" "간 곳이 없"는 "나"를 발견하거나, 자신이 그토록 부정했던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아버지의 그늘」)를 닮아 있다는 사실에 새삼 깜짝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가족주의 또는 부권(父權) 지배적인 세계로부터의 이탈을 시도했지만 결국 혈연과 지연을 그 기반으로 하는 공동체주의적 구속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발견함을 뜻한다. 자칫 타자와의 공존 능력이나 배려의 상실로 인한 개인주의 또는 고립주의로 이어질 수 있는 자유주의 사회의 자유와 자립성 대신 공공의 목적이나 공동선을 중시하는 공동체로의 복귀나 회복을 의미한다.
    그가 넓고 큰 "세상"과 만나기 위해 "대처로 나"와 "이곳저곳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듣는 "즐거움도 알았"지만, 결국 "재봉틀을 돌리는 젊은 어머니와 / 실을 감는 주름진 할머니의 / 실루엣만"이 "세상의 전부"(「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였다는 고백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과 촌락을 기초로 한 농촌 공동체의 생활 정서와 생활 양식을 공유했던 시절에 대한 회고나 추억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자유경쟁 시장과 자본주의적 생산조직, 관료제 등에 대한 반감 또는 대결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자신의 내면을 완강하게 지배하는 원초적인 고향 또는 가족의 세계로의 귀환은 일종의 퇴행 또는 복고주의라기보다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방법론적 의지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제1시집 『농무』 이래로 크고 작은 변화를 거듭하면서도 한결같이 작고 보잘것없는 민중적 삶의 현장과 그 속에 사는 민중의 모습을 일관되게 그려 왔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 사회로부터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기에 있어서 개인의 권리를 사회적 요구보다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인 자립성과 독립성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지만, 말하자면 그는 공동체 속에서 보다 가치 있는 인간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다고 보았던 탓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한 개인은 어떤 종류의 사회 또는 문화 속에서만 더욱 확고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 개입되어 있다.
    즉 그가 한국 민중문학 또는 리얼리즘 계열의 대표적 작가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은 대체로 그의 시가 자유주의적인 시민사회가 갖게 될 한계를 극복하고 보완하는 진정한 시민 공동체의 모색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그의 문학이 전통 사회적 공동체의 해체로 인해 출현한 개인들이 각자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공간으로서의 시민사회가 아닌, 그러한 시민사회를 통해 해소할 수 없는 인간의 공동체적 욕구를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크게 보아 그의 문학은 서로 나눠 가지는 호혜성과 인간적 교감에 바탕을 둔 공동체 사회를 지향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다양한 가치관들이 상호 교차하고 갈등하는 현대사회의 모순과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신경림의 문학을 지배하는 중요한 모티프의 하나는 '길'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고난 개인의 습벽이든, 생계를 위한 것이든, 민요 채집을 위한 것이든 이주 또는 기행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의 시들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어디론가 떠도는 유랑의 상태에서 얻어진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의 첫 시집 『농무』가 대표적이다. 이 시집은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이듬해인 1956년 약관 21세의 나이로 등단한 신경림이 1957년 봄 문득 서울을 떠나 낙향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즉 갑작스런 집안의 몰락과 문단에 대한 실망이 겹쳐 낙향하지 않았더라면, 고향민들의 애환 어린 삶과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을 노래하는 시집의 탄생은 그의 몫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즉 그를 단숨에 한국 민중문학의 대표 작가의 한 명으로 부각시킨 『농무』의 탄생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광부와 농사꾼, 공사장 인부와 학원 강사, 심지어 아편 장수 길잡이까지 하며 십여 년간 고향 인근의 여기저기를 떠돌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생체험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질박하고 구수한 민중적 시 세계는 지식인임에도 불구하고 생계 유지에 급급해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마주친 한결같이 가난함과 동시에 저마다의 아픔을 갖고 있었던 사람들과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거나 관념화되거나 공소화(空疎化)를 면치 못했으리라는 것은 짐작 가는 바이다.
    호구지책으로 충북 충주읍의 한 사설 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하다가 우연히 읍내에서 마주친 문우(文友) 김관식 시인의 권유와 성화로 이른바 무허가촌의 산동네인 서울 홍은동으로 이사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변변한 수입을 기약할 수 없던 시골 생활에 싫증을 내던 차에 김관식의 권유로 인한 서울로의 이주는 피폐해진 농촌 생활에 치여 도시로 떠밀려 온 이농민들과 가난한 이웃들과 마주치게 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단지 고향 주변의 농촌이나 농민만이 아닌 도시 주변부와 그곳에서 이뤄지는 삶을 노래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의 첫 시집에 포함된 「산1번지(山1番地)」와 같은 시와 후일 제4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에서 도시 빈민들의 이모저모를 실감 있게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다분히 그의 서울행이 크게 작용했던 결과라 할 수 있다.
    민요 채집을 위한 기행은 역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생래적으로 여행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1984년부터 '민요연구회'를 결성, 의장으로 활동하며 주로 남한강 일대를 중심으로 충북과 경북의 민요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다분히 제2시집 『새재』에 실려 있는 시 「목계장터」나 「어허 달구」 등에서 보여 준 리듬감과 민요적 여음 도입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막연하게나마 민요적 가락과 내용을 통해 일본과 서구 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자주적이고 민족적인 시 세계를 모색하던 차에 민요 기행은 그의 문학을 더욱 민중적 정서와 밀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가 제3시집 『달넘세』였고 장시집 『남한강』으로 이어졌다. 또한 후일 『민요기행집 1·2』과 『강 따라 아리랑 찾아』와 같은 기행 산문집 발간과 더불어 기행 시집 『길』로 나타났다. 특히 이 과정에서 제4시집 『가난한 사랑 노래』까지 크게 공간적으로 고향 산천 주변을 벗어나지 못하고, 시간적으로 유년기와 청년기에 멈춰 있던 시적 지평이 넓어지고 다소 회고적이고 허무적이던 시적 정서가 더 넓은 세계와 만나면서 좀 더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변화했다. 그에게 민요 기행은 단순히 민요 채집을 넘어 판소리와 탈춤 등 기층문화에 대한 탐색의 여행이었으며, 이는 전통적 형식과 민중적 내용의 결합을 통한 민중 시의 지평을 확대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즉 그가 농촌 "마을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 조금은 서럽고 조금은 구질구질한 사람 사는 꼴"을 "창 너머로 몰래 넘겨다보는 재미"나 "어쩌면 시고 어쩌면 떫은 / 얽히고 설킨 얘기"를 "엿듣는 기쁨"(「늙은 홰나무의 말」)을 누리는 동안 그의 문학을 민중적이고 집단적인 삶의 구체성과 확고히 결합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이러한 민요 기행을 통한 민중적 현장과 삶의 형상화는 현실 참여적인 동시대 후배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층문화에 대한 창조적 접근을 유도하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녹슨 쇠붙이와 안 터진 채 잠든 폭탄 사이를 / 몸을 사리면서 비집고 지"나야 했던 "휴전선" 또는 "민통선"(「북한강행 - 민통선을 넘나드는 만신의 얘기」)과 같은 분단 현장의 답사나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 백두산까지 가겠지"(「언덕길을 오르며」)와 같은 통일 의지의 확인은 민요 기행을 통해 민중적인 현실과 민족적 과제를 결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단지 민요 채집을 위한 것이 아닌, 경주·밀양 등의 우리 국토와 연변·칭따오 등 외국 기행은 민중적 현장의 확장이자 시적 세계관의 확대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민중적이고 역사적인 현장과 사건 중심으로 자신의 시적 외연을 확장해 오는 동안 그의 데뷔작 가운데 하나인 「갈대」가 보여 준 자기성찰적이고 내성적인 세계와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의 현실적 모순과 억압받는 민중의 삶에 시적 세계를 집중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저를 흔드는 조용한 울음"(「갈대」)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삶의 아픔이나 슬픔 등을 다소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자각이 "어둡던 시절에 익힌 / 거친 말들"과 "비바람 속에서 부르던 노래들마저 잊"(「노고지리」)고 "사람살이의 겉과 속을 / 속속들이 알게"(「하산(下山)」)되는, 내면과 외면이 변증법적으로 조화된 '길'의 모색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그가 이리저리 떠돈 것은 일차적으로 한국 현대사 속에서 대다수 한국인들이 맛보아야 했던 고향 상실감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의 시 속에 녹아 있는 실향성 또는 유랑 의식은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고향이 없는 현대인의 비애와 상실감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출향과 낙향, 산동네와 고향 산천 등으로 얼룩진 그의 생애와 문학 인생은, 다름 아닌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길"(「길」)의 발견과 맞닿아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착해서 못난 이웃들"과 "고샅의 두엄 냄새"에 대한 이중적인 애증의 정서에서 비롯된 그의 시적 행보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 길"이나, 그렇다고 "내 고장으로 가는 길"만도 "아"(「그 길은 아름답다」)닌,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이미" "놓고 왔는지도 모"르는 그 "무엇인가"(「떠도는 자의 노래」)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순순히 사람의 뜻을 좇지" "않"는 "길"위에서 "산다는 것"(「갈대」)의 의미 또는 삶의 정체성을 물어 왔던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결과, 그는 여전히 집합적이고 집단적인 내면성을 중시하는 가운데서도 후기 시에 올수록 "온갖 노래"와 "다툼", "옳고 그름"을 "모두 끌어안"(「강물을 보며」)을 자세를 보여 준다. 이와 동시에 자신이 목격하고 "바라던 것"만을 "현상"하려는, 즉 대(對)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긴박성과 요청에 따른 민중적인 현실이나 집합적 내면성에 주목한 결과, "바라지 않던 것"을 모두 "환시"(「고장난 사진기」)였다고 무시해 버린 것에 대한 일정한 반성과 성찰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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