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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근 - 폭설을 기다리며시(詩)/정일근 2014. 2. 17. 12:06
남쪽에 큰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를 믿기로 하자
오늘은 밤을 새워서라도 눈을 기다리기로 하자
무엇인가를 간절히 믿어본지 오래고
또 무엇인가를 기다려본지 참 오래다나는 마당에 나가 벚나무와 함께 직립으로 서서
고립무원의 폭설을 기다린다
나에게서 출발했던 모든 길을 버리고
나에게로 돌아왔던 모든 길을 버리고
오직 하늘의 길을 기다린다돌아보면
내가 택했던 길들은 나를 버렸고
나를 택했던 길들은 내가 버렸다
나는 얽히고설킨 세상의 그 길을
하얀 지우개로 지워버리고 싶은 것이다내가 운명으로 믿었던 손금 속의 길을 지우고
내 몸 속으로 퍼져있는 붉은 실핏줄의 길을 지우고
내 안과 밖의 모든 경계를 지워버렸을 때
하늘에서는 폭설이 내려와 지도를 만들 것이니
아무 것도 기록되지 않는 순백의 지도 위에
발자국으로 이어지는 내 길을 만들 것이다뜨거운 발자국만이 길을 만들 것이니
차가운 지도 위에 가장 뜨거운 길을 내며
나에게로 가는 길을 만들고 싶은 것이니
남쪽에 내린 즐거운 폭설주의보를 믿으며
하늘주머니 터져 쏟아져 내릴 폭설을 기다린다
축복의 폭설 기다리며(그림 : 신재흥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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