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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용택 - 그 여자네 집
    시(詩)/김용택 2014. 2. 13. 12:52

     

    가을이면 은행나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집
    해가 저무는 날 먼데서도 내 눈에 가장 먼저 뜨이는 집
    생각하면 그리웁고
    바라보면 정다운 집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속에 깜박깜박 살아 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 오는 집
    살구꽃이 피는 집
    봄이면 살구꽃이 하얗게 피었다가
    꽃잎이 하얗게 담 너머까지 날리는 집
    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샛노란 은행잎이 지고 나면
    그 여자
    아버지와 그 여자
    큰오빠가
    지붕에 올라가
    하루 종일 노랗게 지붕을 이는 집
    노란 초가집

     

    어쩌다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 여자네 집 마당이 보이고
    그 여자가 마당을 왔다갔다하며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말인가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소리와
    옷자락이 대문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면
    그 마당에 들어가서 나도 그 일에 참견하고 싶은 집
    마당에 햇살이 노란 집
    저녁연기가 곧게 올라가는 집
    뒤안에 감이 붉게 익는 집
    참새떼가 지저귀는 집
    보리타작, 콩타작 도리깨가 지붕 위로 보이는 집
    눈 오는 집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 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어두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김칫독에 엎드린 그 여자의 등에
    하얀 눈송이들이 하얗게 하얗게 내리는 집
    내가 함박눈이 되어 내리고 싶은 집

     

     

    밤을 새워, 몇 밤을 새워 눈이 내리고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늦은 밤
    그 여자의 방에서만 따뜻한 불빛이 새어나오면
    발자국을 숨기며 그 여자네 집 마당을 지나 그 여자의 방앞
    뜰 방에 서서 그 여자의 눈 맞은 신을 보며
    머리에, 어깨에 쌓인 눈을 털고
    가만가만 내리는 눈송이들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가만 가만히 그 여자를 부르고 싶은 집

    그여자네 집

     

    어느 날인가
    그 어느 날인가 못밥을 머리에 이고 가다가 나와 딱
    마주쳤을 때
    "어머나" 깜짝 놀라며 뚝 멈추어 서서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며 반가움을 하나도 감추지 않고
    환하게, 들판에 고봉으로 담아놓은 쌀밥같이,
    화아안하게 하얀 이를 다 드러내며 웃던 그
    여자 함박꽃 같던 그여자
    그 여자가 꽃 같은 열아홉살까지 살던 집
    우리 동네 바로 윗동네 가운데 고샅 첫집
    내가 밖에서 집으로 갈 때
    차에서 내리면 제일 먼저 눈길이 가는 집
    그 집 앞을 다 지나도록 그 여자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저절로 발걸음이 느려지는 그 여자네 집

     

    지금은 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집
    내 마음속에 지어진 집
    눈감으면 살구꽃이 바람에 하얗게 날리는 집
    눈 내리고, 아, 눈이, 살구나무 실가지 사이로
    목화송이 같은 눈이 사흘이나
    내리던 집
    그 여자네 집
    언제나 그 어느 때나 내 마음이 먼저 가 있던 집
    그 여자네 집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 각. 을. 하. 면...

    (그림 : 한영수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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