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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철 - 공친 날의 풍년가
    시(詩)/최영철 2013. 12. 25. 11:59

     

     

    어느 봄날 춘궁기 주막거리 외상값 떼먹고
    깡마른 들판을 내팽개치고 나온
    그들은 지금 인력시장 옆 구멍가게에서
    주전부리가 한창이다

     

    일당 놓치고 라면에 빵에 늦은 아침을 때우는데
    마침 가는 빗줄기가 그들이 앉은 평상 위로 떨어졌고
    초가을 가랑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 중 하나
    에이 오늘도 공쳤다며 막걸리 서너 통 바닥에 늘어놓았다


    일찍부터 줄 선 젊은 아이들 보며
    오늘 또 공친 줄 벌써부터 알았던 중늙은이들이
    입맛 다시며 엉덩이 당겨 앉으며
    때마침 마누라에게 고해바칠 핑계거리가 되어준
    가랑비가 고마웠던 것이다


    먹다 만 라면 국물 동그란 파문으로 깨어나
    주섬주섬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던 훈김들이
    빗줄기에 덜미가 잡혀 처음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오늘은 공친 날, 대포 한 잔 하는 사이
    새우깡이 젖고 히끗하게 날선 머리카락이 젖고
    어제도 그제도 땀을 받아먹지 못해 빳빳해진
    작업복이 젖고 있었다

     

    후줄근히 어깨 힘을 풀고
    막걸리 두어 잔에 비는 땀처럼
    둘러앉은 대여섯을 골고루 적셨다 젖을 만큼 젖자
    한나절 가대기를 하고 난 몸처럼 모두 말수가 적어졌고
    젤로 늙어 보이는 영감 하나
    시키지도 않은 노랫가락을 뽑아낸 것이었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 풍년이 왔네 지화 좋다 얼씨구나,
    웬 느닷없는 풍년가냐고 머쓱해 하던 사내들
    늦게 감 잡고, 노가다 일당은 흉년이라도
    들판 나락은 풍년이라네 얼씨구절씨구 풍년이라네
    미리 약속이나 한 듯 으쓱으쓱 모 심고

    덩실덩실 벼 베는 어깨춤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림 : 최종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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