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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부는지 뒷산에서
서투른 나팔 소리 들려온다
견딜 수 없는 피로 때문에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그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여름내 햇볕 즐기며
윤나는 잎사귀 반짝이던 감나무에
지금은 까치밥 몇 개
높다랗게 매달려 있고
땅에는 떨어진 열매들
아무도 줍지 않았다
나는 어디쯤 떨어질 것인가
낯익은 골목길 모퉁이
어느 공원 벤치에도 이제는
기다릴 사람 없다
차라리 늦가을 벌레 소리에 묻혀
지난날의 꿈을 꾸고
꿈속에서 깨어나
손짓하는 코스모스에게 묻고 싶다
봄에는 너를 보지 못했다
여름에는 어디 있었니
때늦게 길가에 피어난 꽃들
함초롬히 입 가리고 웃을 것이다
아직도 누군가 만나
나누고 싶은 이야기
굳게 입 다물고
두꺼운 안경으로 눈 가리고
앓고 싶지 않은 병
온몸에 간직한 채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다
아득한 젊은 날을 되풀이하는
서투른 나팔 소리
참을 수 없는 졸음 때문에
마지막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그의 말을 이제는 알 것 같다
(그림 : 안기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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