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형도 - 진눈깨비시(詩)/기형도 2013. 11. 26. 16:48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껏 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에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했다, 진눈깨비
(그림 : 박승태 화백)
'시(詩) > 기형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형도 - 흔해빠진 독서 (0) 2013.11.26 기형도 - 추억에 대한 경멸 (0) 2013.11.26 기형도 - 정거장에서의 충고 (0) 2013.11.26 기형도 - 늙은 사람 (0) 2013.11.26 기형도 - 그집 앞 (0) 2013.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