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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도현 -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
    시(詩)/안도현 2013. 11. 23. 13:27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
    후광과 거산의 싸움에서 내가 지지했던 후광의
    패배가 아니라 입시비리며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이 아니라
    대형 참사의 근본원인 규명이 아니라
    전교조 탈퇴 확인란에
    내 손으로 찍은 도장 빛깔이 아니라
    미국이나 통일문제가
    아니라 일간신문과 뉴스데스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
    나를 열 받게 하는 것들은,

    이를테면,
    유경이가 색종이를 너무 헤프게 쓸 때,
    옛날에는 종이가 얼마나 귀했던 줄 너 모르지?
    이 한마디에 그만
    샐쭉해져서 방문을 꽝 걸어 잠그고는
    홀작 거리는데
    그때 그만 기가 차서 나는 열을 받고
    민석이란 놈이 후레쉬맨 비디오에 홀딱 빠져있을 때,
    이제 그만 자자 내일 유치원 가야지 달래도 보고
    으름장도 놓아 보지만 아 글쎄,
    이 놈이 두 눈만 껌뻑이며
    미동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아비로서 말못하게 열 받는 것이다

    밥 먹을 때,
    아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시장을 못 갔다고
    아침에 먹었던 국이 저녁상에
    다시 올라왔을 때도 열 받지만
    어떤 날은 반찬 가지 수는 많은데
    젓가락 댈 곳이 별로 없을 때도 열 받는다
    어른이 아이들도 안 하는 반찬 투정하느냐고
    아내가 나무랄 때도 열 받고
    그게 또 나의 경제력과 아내의 생활력과
    어쩌고 저쩌고 생활비 문제로 옮겨오면
    나는 아침부터 열 받는다
    나는 내가 무지무지하게 열 받는 것을
    겨우 이만큼 열거법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나 자신한테 열 받는다
    죽 한 그릇 얻어먹기 위해
    긴 줄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처럼
    열거는 궁핍의 증거이므로

    헌데
    열 받는 일이 있어도
    요즘 사람들은 잘 열 받지 않는다
    열 받아도 열 받은 표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요즘은 그것이 또한

    나를 무진장 열 받게 하는 것이다

    (그림 : 이완호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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