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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남은 것이 있다면
저녁 분꽃이 피는 장면을 바라보는 일
수박에 박힌 까만 씨만큼 꿈을 꾸는 일
씨앗을 담을 하얀 종이봉투와
묻어 둘 것들을 위해
모종삽을 사러 가는 일
여름을 이루는 말들과
잘 짜 놓은 겨울의 담요
첫눈이 손바닥에서 녹지 않고 내려와
눈사람을 만드는 일
생활의 간결한 숟가락이 놓인 식탁
온 산을 들어 올린 나무들과
선반 위의 화분들
그루터기에서 여전히 날아가는 새들
품은 알들이 모두 새가 되는 건 아니지
사랑의 격자무늬가
손가락에서 만져지겠지
그래도 남은 것이 있다면
볕 좋은 날, 대나무 채반에
잘 말린
미래의 약속처럼(그림 : 이영철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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